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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단편소설

콘트라스트 스팬(contrast span)

by 에세이와 소설 202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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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모제스는 긴 잠을 잤다. 그 긴 잠은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누군가 올 것 같은 예감. 그 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얇고 긴 관에서 일어나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곤 산 중턱의 절벽으로 향했다. 평소 위스키 수집가이던 그는 싸구려부터 최고급을 신경 안 쓰고 전부 가져왔다. 보라색 텐트를 절벽에 피고 전구를 매달았다. 절벽까지 올 수 있는 길을 만든다. 가게의 이름은 프라베르니아스다. 이제 누군가 올 때까지 위스키를 음미하기만 하면 된다.

 

김영희의 하루는 똑같다. 그녀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을 차린다. 남편이 밥을 먹고 7시에 출근을 하면 아들을 깨운다. 아들도 똑같이 아침을 먹이고 등교를 보낸다. 그 후에는 집안일을 시작한다. 설거지하고 식기들을 전부 똑같이 배열한 다음 청소기를 돌린다. 세탁감이 쌓였으면 세탁기를 돌리고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 둔다. 그 후 미리 저녁을 만들어 놓는다. 그렇게 할 일이 끝난 시간은 고작 아침 11시다.

할 것이라고는 TV 시청밖에 남지 않았다. 결혼하면서 남편의 고향으로 왔기에 친구 하나 없다. 가끔 오는 전화통화는 대부분 안부 인사일 뿐이다. 혼자서 덩그러니 집 안에 남아 고독함을 보낸다.

신혼 때는 괜찮았다. 남편은 퇴근하면 바로 그녀를 안아주고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했다. 물론, 남편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년이 지나자 남편의 퇴근 후는 바뀌었다.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아내에게 말하는 것보다 밥을 먹고 빨리 휴식을 취하는 게 더 큰 낙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쓸쓸함을 맞이해야 했다.

아들이 태어나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괜찮았다. 아들과 할 일이 많았으니까. 공원도 산책하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은 어느새 8살로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그나마 일상에서 변수를 주던, 그러니까 감정에 변수를 주던 상황도 사라졌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됐고 하루가 점점 질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산책하러 나가보기도 했다. 첫날은 상쾌했다. 지저귀는 참새 소리 또박또박 들리는 걸음 소리 그리고 어쩌면 소음이라고 생각해 불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자동차 배기음까지 좋게 들렸다. 하루에 1시간을 산책하고 돌아오면 뿌듯함이 몸을 감싸 안았다. 샤워 후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임시방편은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 해결사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가 일상에서 느끼는 기분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라 선 밑을 맴도는 우울함과 슬픔뿐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말해주어봤자 혼돈만 일으킬 거로 생각한 그녀는 남편에게 오늘은 꼭 말해 보기로 했다. 모든 일을 마친 시간은 오후 2시 남편의 퇴근까지 4시간 남았다. 아들은 평소 방과 후 활동에 취미를 붙였는지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 4시간 동안 시체처럼 소파에 누워 TV를 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기 위해 채널을 계속해서 돌린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눈에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잠이라도 잘까 봐 안방 침대로 가서 누워봤지만, 눈만 감은 채로 시간을 허비할 뿐이었다. 그렇게 넋 놓다 시간 보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지만, 가기는 갔다. 어느새 저녁 5시를 가리켰다. 그녀는 조금 초조했다. 남편에게 말했다가 오히려 말싸움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기분을 말해도 남편은 자기가 더 지치고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아내의 일상도 다 그런데 왜 너만 그러냐고 따지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남편이 들어오고 그는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인사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방에서 다시 나온 남편이 말했다.

밥은?”

평소랑 똑같은 단어 그리고 똑같은 말투 그런데 왜 그렇게 거슬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내는 인덕션 위에 놓인 찌개와 고기 조림을 그릇에 덜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지고 말없이 부부는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한마디 오가지 않는 차가운 분위기 음식들은 따뜻한 열기를 펼치고 있었다. 이내 식사를 먼저 마친 남편이 일어나 부엌에 가서 그릇을 놓았다.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나 할 얘기 있어. 잠깐 앉아 봐.”

남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피곤함에 절어 있었고 하필이면 오늘 상사에게 된통 깨진 날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다.

나 피곤한데 나중에 하면 안될까?”

아내는 그 나중에라는 말이 정말 싫었다. 그렇게 말하고서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결국, 그녀는 말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나중에라는 말 언제까지인데?”

남편이 이상함을 눈치챈 건 이때였다. 그러나, 달래주고 공감해주기보다는 안타깝게도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했다.

말투가 왜 그래?”

남편의 말투도 물론 이상했다. 진심으로 궁금하거나 걱정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닌, 자신에 향해 드는 반기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아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격양된 말투로 말했다.

매일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언제 내 얘기 들어줄 건데?”

남편은 갑자기 지르는 소리에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다는 점에 크게 화가 났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 피곤한 거 안 보여? 매일 집에서 놀기나 하면서 뭘 안다고.”

? 내가 놀기만 해? 집안일도 바빠. 내 자식 키우는 것도 바쁘고 매일 밖에서 싸돌아다니기만 해서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르지?”

? 싸돌아다녀? 지금 여기 있는 집, 그릇, 소파, TV 그거 말고도 전부 내 돈으로 벌어서 산거야! 나 없으면! 당신 여기 있지도 못해.”

그는 그 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더는 서로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실망했다. 물론, 자기가 먼저 화를 냈으나 예전이었다면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쓰다듬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언제 저렇게 변해버린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부엌에서 설거지할 뿐이었다.

곧이어 아들이 들어왔다. 그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오늘 한 것에 대해 자랑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기만 하는 다른 애들과 다르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그런 마음이 기특했다. 사실 그냥 아들이었기 때문에 모든 면이 기특해 보인 걸 수도 있다. 아들의 자랑이 끝나면 나오는 소리는 하나였다.

엄마 나 용돈 줘. 준비물 사야 해.”

똑같은 패턴이었다. 물론 줘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녀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며 아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아들은 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무슨 날이라고 그냥 내 기분이 가끔 흐트러지는데 그것이 유독 심한 날이라고,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방에 들어가 보니 남편은 이미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에 눕기가 싫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남편을 치울 수도 말을 섞기도 싫었다.

산책하러 나가기로 했다. 시간은 저녁 9시였다. 오늘은 이상하게 힘이 들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땀을 빼고 숨을 헐떡이고 싶었다. 아마도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끼고 싶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산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가 떨어져 위험할 수도 있지만, 코스에 수도 없이 놓인 전구들이 그런 걱정을 없애게 했다. 생각보다 낮은 산이기에 3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자신 혼자밖에 없었다.

 

내려가려는 순간 이상한 것이 하나 보였다. 바로 절벽 맞은편 중턱에 놓인 보라색 텐트였다. 그것에도 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갈 수 있는 다리까지 있었다. 호기심이 들어 한 발짝씩 다가갔다. 이윽고 텐트 위에 나무 간판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프라베르니아스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텐트 안을 들어가자 마치 고급 칵테일바 같았다. 어두운 조명에 양옆으로 가득 찬 알 수 없는 위스키들이 있었다. 나가려는 찰나 에모제스가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고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생각했다. 고민이라니.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애초에 이런 특별한 장소에 이런 특별한 것이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녀는 에모제스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가 말했다.

혹시 좋아하시는 위스키가 있을까요?”

그런 건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어서…….”

그는 고급스러운 위스키 하나를 가져오더니 잔에 얼음을 넣고 그 위에 위스키를 부었다. 차가운 온도에 의해 결빙 현상이 일어났다. 그가 말했다.

술을 하지 못하셔도 마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위스키들은 다르니까요. 취하는 게 걱정이라면 그것 또한 괜찮습니다. 취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여전히 이 이상한 것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에 있는 무언가가 끌리는 듯했다. 여기에 조금 더 있어도 된다는 것 같은 생각 말이다. 그녀는 위스키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조금 마셨다. 평소에 알고 있던 술과는 아예 다르게 달콤하고 시원했다. 마치 음료수처럼. 하지만 음료수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왜 여기 온 거죠?”

그는 위스키를 조금 더 따르고 말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고민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일상을 털어놓아도 되는가. 요즘에 이런 사기들이 판을 친다는데. 걱정부터 시작되어 가격을 물었다.

혹시 상담 비용이나, 위스키 가격이 얼마나 되나요?”

돈은 받지 않습니다. 다만 마지막에 저와 거래를 하실 때 값은 치르셔야 할 겁니다.”

그녀는 위스키를 마신 이후부터 마음이 침착해졌다. 평온하고 고요했다. 그의 말에는 신뢰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아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언제나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요즘 들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천천히 말이다. 입을 뗐다.

일상이 지루하고 화가 나요. 별 것 아닌 일에도 서운하게 느껴지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군요. 더 얘기해 보시죠.”

하루가 똑같아요. 옛날을 상기하며 행복을 바라도 그것 근처에도 가지 못해요. 옛날에는 이랬는데. 옛날에는 저랬는데.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는데.”

이야기를 듣던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었다.

바뀐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바뀐다면 좋죠. 하루하루가 기쁘고 행복하고 그러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슬픔이나 우울 같은 거 다 떨쳐버리고 싶어요.”

그렇다면 저랑 거래하시면 됩니다. 간편합니다. 제가 감정을 드리는 대신 저에게 감정을 하나 주시면 됩니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무슨 감정을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필요 없는 감정도 받아주시나요?”

그럼요.”

그럼 슬픔을 드릴게요. 대신 기쁨을 주세요.”

그렇게 해 드리죠.”

그녀는 그 말을 하는 순간 마음에 있는 무언가 빠져나가고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환불이나 교환은 어렵습니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이게 끝인가요?”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다리를 건너면서 생각했다. 묘하게 사기를 당한 것 같으며 시간도 낭비한 것 같다고 말이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애초에 잘못 봤을 거로 생각하며 하산을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자 모든 조명은 꺼져 있었다. 안방에는 남편이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에 실망감을 가지고 잠이 들었다.

 

똑같이 아침 6시에 일어나 밥을 차렸다. 그녀는 이때까지만 해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말했다.

잘 먹을 게 고마워.”

평소라면 아무 말 하지 않거나 반찬이 짜거나 싱겁다며 말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밥을 차린 뿌듯함이 살짝 들었다. 이윽고 7시에 남편이 출근하려고 현관으로 나가자 그녀가 말했다.

잘 다녀와.”

남편은 팔을 벌리고 그녀를 기다렸다. 곧이어 그녀가 남편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남편은 그녀의 볼에 입맞춤했다.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둘은 동시에 웃으며 각자 갈 길을 갔다. 남편의 출근을 바라본 후 아들을 깨웠다. 아들은 일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엄마는 잘 잤어?”

그러지 않아도 좋은 기분에 그녀는 웃으며 이라고 대답했다. 아들 또한 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그녀에 대한 배려가 넘쳐났다.

그녀는 어제의 일이 실제로 무언가 변화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했다는 마음이 벅차올랐으며 이제는 저번과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녀는 평소라면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질 집안일이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가족에게 받은 배려심과 기대감이 그녀의 원동력이 되었다.

남편은 퇴근 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예전이었다면 정적과 고요함만이 가득했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남편은 아내에게 오늘 하루에 관해 물었고 자기 일도 얘기했다. 오가는 대화 그러니까, 소통의 중요성은 대단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같이 드라마를 보며 저 사람은 어떻다 이 사람은 어떻다 얘기를 나누며 웃기도 했다. 아들은 8시에 집에 돌아오고 애교를 부리며 자신의 얘기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 완벽한 하루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녀는 미친듯한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슬프지 않아서. 우울하지 않아서. 눈물이 흐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감정에 시달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에도 기쁘지는 않았지만, 슬프지도 않았다. 알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이 그녀를 감싸 놓아주지 않았다. 부고 소식을 들을 때부터 장례식이 치러질 때까지 그녀는 수많은 공감과 위로를 받았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슬프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그 감정의

거래가 생각이 났다. 슬픔과 우울함이 필요할 때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장례식이 끝난 후 그를 찾기 위해 산에 올라갔다. 밤이었고 보름달이 하늘에 걸쳐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귀를 스쳐 붉게 만들었다.

산 정상에 위치하자 맞은편에 보라색 텐트에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윽고 텐트에 도착하자, 에모제스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맞은편 자리에 앉고 그에게 바로 말했다.

감정을 다시 거래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조용히 위스키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잔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다시 돌려주세요.”

그는 약간의 비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두 손을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말했을 텐데요. 교환이나 환불은 어렵다고.”

저를 도와주기 위해 그런 거 아니었나요?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돌아가시지요.”

그러자 그녀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이 그의 꾀임에 넘어갔다는 듯이 말이다.

! ! 못 돌려줘요! 애초에 내 것이잖아요. 당신이 가져간 거잖아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귀찮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모습을 바꾸었다.

이래서 인간들은 안된다니까.”

모습은 흡사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악마였다. 그녀는 놀라서 뒤로 자빠진 채 공포에 떨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서 온 거야. 모든 감정은 어디선가 필요해. 그걸 판 건 당신이잖아? 그럼 그에 맞는 대가도 감당해야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반대편으로 달렸다. 긴 다리를 건너자 숨이 벅찼다. 뒤를 돌아보자 다리는 물론이고 텐트도 보이지 않았다. 꿈이라도 꾼 것인지 환상을 본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이지수는 고된 취업 시장에 지쳤다. 하지만,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 중소기업에 서류를 넣었다. 1차 합격이 발표되는 날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이번에도 매크로로 작성한 탈락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러나, 기쁘거나 좋지는 않았다. 면접이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면접 당일 그녀는 아침 7시에 일어나 화장했다. 그리고 떨리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면접장을 향했다. 버스를 타고 걷기 시작하자 기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떨리고 초조한 마음만이 가득 채워졌다.

도착하자 면접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없었다. 이윽고 면접을 시작했다.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른 답변 하지 않았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다는 소리다. 면접을 끝내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님은 면접에 관해 물었다. 부모님은 이번에는 제발 되길 바라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그럭저럭 잘 봤어.”

부모님은 이번에도 안됐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떨어지면 언제나 저런 대답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일주일이 되지 않아 메일이 하나 더 도착했다. 그녀는 메일을 확인했다. 최종합격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밖으로 나가 부모님께 이 소식을 알렸다. 그날은 작은 파티가 열렸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밥상이 차려졌고 부모님은 잘됐다는 말만 계속해서 하며 자신의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의구심을 가졌다. 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증 하나 남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그 증거였다. 이런 생각들은 잠시 머릿속을 비우지 못하게 했으나, 취업했다는 사실이 더 다가와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첫 출근이었다. 정장을 입고 향수도 뿌렸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소리가 많이 들려와 나름 신경 썼다. 출근하자마자 인사를 하고 일을 배웠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오랜 공백 때문인지 일머리가 거의 사라졌다.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그저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는 언제나 열심히 가 아닌 결과로 보이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도 그녀는 2% 부족이 아닌 20%가 부족했다. 얼렁뚱땅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열심히 하면 달라지겠지라는 마음을 가지며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탕비실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다른 직원들의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번에 들어온 사원 일을 못 해도 너무 못해. 열심히 하긴 하는데 저렇게 일머리가 없어서 원. 괜히 뽑았나 싶어.”

그러니까요. 애초에 대학교도 이름도 없는 지방대에 자격증도 하나 없고 간편한 서류처리도 못 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요.”

그녀의 아킬레스건이 모두 등장했다. 따놓은 자격증도 없고 이름 없는 지방대가 그것이었다. 탕비실에서도 저런 뒷담화를 하는 정도면 평소에 다른 자리에서 얼마나 뒷담화를 하는지가 예측되었다. 그녀는 바로 퇴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받아줄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로 그녀는 열심히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받는 만큼만 일하자고 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평들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녀는 주임에게 자주 불려가서 한 소리 들었으며 회식도 적응하지 못하고 자주 빠지기 일쑤였다. 회사에서는 그녀를 친화력도 일머리도 없는 말 그대로 장점 하나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그녀는 점점 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터질 듯 말 듯 매일매일 꾹꾹 억눌러야 했다. 폭발한다면 한순간에는 후련하겠지만, 그 이후의 뒷감당이 무서웠으니 말이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위스키를 마셨다. 약간의 취기가 도는 그 느낌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그 상황만을 타개하는 것일 뿐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토요일에 그녀는 등산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은 다름 아닌, 상쾌함을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최대한 겹치지 않게 밤에 올라가기로 했다. 여름이었기에 해가 늦게 졌다. 저녁 6시 운동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체력이 언제 이렇게 나빴는지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산꼭대기에 달했을 때는 해가 거의 다 졌다. 아직 끄트머리에 빛이 조금 들어오고 있었다.

하산하려는 순간 맞은편 중턱에 보라색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약간 어두운 조명에 빛이 조금 빛나고 있었다. 나무다리로 이어져 있었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끌리듯 그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라색 텐트 입구까지 왔다. 그녀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은 이상하리만치 아늑했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에모제스는 인기척을 눈치채고 의자에 앉았다.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니 주변을 서성거리는 한 사람이 보였다. 아직 자신을 보지 못했는지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 두 번을 했다. 그러자 이지수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 그때 그가 말했다.

앉으시지요.”

그녀는 다시 한번 무엇에라도 홀린 듯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평소 술을 좋아하던 그녀는 이곳이 위스키 바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가 말했다.

주문하면 되나요?”

. 물론입니다.”

그녀는 아까의 놀람은 어디 가고 안정된 톤으로 말했다.

발렌타인 30년산 1온스 주세요.”

이렇게 구체적인 주문은 처음이라 그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인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어떤 필요성 때문일지 말이다. 그는 농담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여기는 가격이 꽤 나가는 데 괜찮으신지요?”

그녀는 당황했다. 하긴 메뉴판도 없었고 이런 곳에서 바가지를 씌울거라는 생각은 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일어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올게요.”

말이 끝나는 순간 에모제스는 농담이 너무 지나쳤나 싶었다. 그는 그녀가 나가기 바로 직전에 다시 말했다.

농담입니다. 위스키는 전부 무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신 이유가 있지 않나요?”

그녀는 여기에 오신 이유보다 무료라는 말에 혹해서 다시 앉았다. 그 사이에 그는 위스키를 자주 마시던 그녀라고 생각했기에 전용 잔 노징 글라스에 위스키 1온스를 따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순간 그녀는 위스키 맛이 이렇게 극대화되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잔을 타고 올라오는 향이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놀라면서 말했다.

진짜 무료 맞죠?”

. 맞습니다.”

그녀는 다른 위스키도 여러 종류를 시켰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하나 느꼈다. 위스키를 마실수록 취기는커녕 점점 평온함이 찾아온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3잔째를 마시며 느꼈다. 그녀가 물었다.

이상하게 취하지가 않네요.”

당연합니다. 몇 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녀는 또 한 번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이 사람에게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화풀이나 짜증 같은 것이 아닌 상담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처음에는 꾹꾹 눌러 참았다.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5잔을 마시자 그 생각은 변했다. 어차피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그냥 얘기하기로 했다.

저 사장님.”

그는 이 타이밍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는 인지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 말씀하시죠.”

그녀는 잔에 있던 위스키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최근에 제가 취업을 했어요.”

축하드립니다.”

근데 축하받을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직장 내에서 사실상 왕따를 당하고 있거든요.”

그는 침착하고 제삼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애초에 공감하거나 달래는 짓은 하지 않았기에 그가 답했다.

왜 그렇게 느끼셨나요?”

그야. 뒷담화도 하고 자주 혼내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뒷담화하는 것도 제가 들었고요. 그 내용을 들으니까 더 다가가기가 어려워요.”

그렇군요. 뒷담화는 왜 나온 것 같아요?”

그때 그녀는 알아차렸다. 아니,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세상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며 사회와 타인에게 문제를 돌렸다. 그러나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받는 순간 그 사태가 벌어진 원인의 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사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죠. 그런데 누가 부족 하고 싶어서 그러나요? 저도 처음에는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잖아요. 친화력도 일머리도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한 제가 뭘 하겠어요.”

에모제스는 슬슬 본론을 꺼낼 타이밍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의 푸념을 들어준 이유는 사실상 본론을 꺼내기 위한 발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조금 더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가 말했다.

그럴 때는 어떤 감정이 들어요?”

그녀는 마치 그가 자신을 약간씩 조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적정선의 마지노선은 지켰다. 선 바로 아래쪽까지 질문하는 그에게 약간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그 감정은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보다 불쾌한 쪽에 가까웠지만, 위스키 때문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답했다.

박탈감, 분노, 허탈함 이런 감정들의 끝없는 나열이죠. 좋다는 감정이 들을 리가 없잖아요.”

그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감정의 거래를 말이다.

그런 감정들과 다른 감정들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아예 깨버렸다.

바꾼다고 달라질까요? 정신승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 같은데요.”

그는 당황했다. 이런 종류의 인간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이라면 좋은 감정이 들고 싶다고 말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러나지 않고 답했다.

감정은 생각보다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감정에 따라 행동도 달라지며 그 행동은 또 다른 결과를 낳기 마련이죠. 그래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신지요.”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고 어두컴컴한 시야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애석하게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빛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할 때쯤 자신이 빛을 만들면 그만이지 않은가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요.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설마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살면 뭐든지 극복해 나갈 수 있어요. 같은 말은 아니겠지요?”

그는 승기를 잡았다. 확실함을 잡았다. 이때 밀어붙이자고 확신했다.

저랑 거래하시죠.”

무슨 거래요? 저한테는 줄 게 없는데요.”

주실 게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감정입니다.”

그녀는 위스키의 취기가 갑자기 확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이 사람의 말에는 무언가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가진 감정은 전부 부정적인데요.”

저는 편식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감정이든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감정을 드립니다. 어떠십니까? 저랑 거래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솔직히 말해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부정적인 감정을 주고 긍정적인 감정을 얻는다면 혹시라도 달라질 수도 있는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숨소리를 조금 크게 내쉴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천천히 생각하시죠. 아직 밤은 깊으니까요.”

그때 그녀는 시간이 떠올랐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할 틈도 없이 그녀는 애초에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음을 알았다. 위스키를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심지어 고급 위스키도 무료였다. 또한, 감정의 거래라니, 꿈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위스키를 한 번에 다 털어놓고 탁자에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은 다음 얘기했다.

박탈감, 허망함, 분노를 드릴게요.”

에모제스는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음을 깜빡했다. 바로 하나의 감정만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나 말 안 드린 것이 있네요. 거래는 하나만 가능합니다. 하나만 얘기해주시죠.”

그녀는 조금 아쉽다는 아니, 매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것에 말이다.

. 그런가요? 그러면 박탈감으로 거래하시죠.”

. 좋습니다. 그럼 무슨 감정을 드리면 될까요?”

그녀는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박탈감과 반대되는 말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반대되는 말이 없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박탈감과 반대되는 감정 중에서 제일 가까운 단어를 말했다.

우월감을 주세요.”

. 좋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몸 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가고 채워지는 그런 기분 말이다. 하지만 정작, 바로 달라졌다는 점은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말했다.

아직, 달라진 것을 느끼지는 못하겠는데요.”

내일이면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더 마시다 가도 되나요?”

그럼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따지자면 거의 6시간 정도를 죽치고 있다 들어갔다.

 

다음날 그녀는 완전 딴판이 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회사에서 죽을상을 하고 위축되게 다녔을 텐데 그날은 태도부터 완전히 달랐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탕비실에서 드디어 미친 것이 아니냐고 뒷담화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못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일머리는 여전히 모자랐다. 실수와 오류투성이였다. 주임은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고 따로 불렀다. 주임이 끝자락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요? 고치기는커녕 계속 이대로면 하.”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우월감은 그녀를 자만하게 했고 이는 오만으로 변했다.

그럼 직접 하시지 그랬어요.”

어제만 해도 잘못했다며 빌고 바로잡겠다며 말이라도 한 그녀였는데 이제는 태도까지 뻔뻔해진 것이었다. 주임은 당황하며 말했다.

?”

얘기 제대로 들으셨잖아요. 왜 못 들은 척하세요? 한 번 더 말해드려요?”

뭐라고요?”

직접 하시지 그랬어요.”

주임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냥 문을 박차고 나갔다. 딱 봐도 얼굴에는 분노가 씌워져 있었다. 이지수는 그대로 물을 끓여 녹차를 타 마셨다. 개운한 기운이 그녀를 맴돌았다.

그 이후로 그녀는 매우 간편한 일 이외에는 맡지 못했다. 직원들의 불만은 터져 나왔다. 팀장은 그런 것을 잠재우기 위해 인사평가가 다가오는 날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는 그런 것도 모른 채 당당하게 아니, 어쩌면 뻔뻔하게 행동했다.

그녀의 퇴근은 언제나 정시인 6시였다. 일하지 않자 다른 사람들은 야근의 횟수가 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이 만든 결과라며 남 탓을 하고 이기심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인사평가가 시작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해고 통지서를 받는다. 그녀는 곧바로 따지기 시작했다.

제가 왜 해고에요?”

팀장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했던 짓들을 생각하지 못 하는 건가라며 말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했다. 예의를 차리지 못하고 반말로 큰 소리로 말했다.

몰라서 물어? 당신이 했던 거 생각해 봐! 일 다 떠넘기고 매일 정시에 퇴근하고 그러면서 월급은 또박또박 받고 나랑 장난해!”

이지수의 반응은 인간의 도리라면 지켜야 할 선을 이미 넘었다.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먼저 일만 시키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고용노동부에 신고할 거예요. 부당 해고로요.”

가르쳐? 여기가 학교야? 여긴 회사야! 그리고 뭐? 부당 해고? 해 봐 맘대로.”

이지수는 비꼬는 말투로 한 번 더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 ~ 여기 없으면 갈 곳 없는 줄 아나.”

팀장은 돌아서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끝까지 말했다.

! !”

그러나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2시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나갈 시간이라 혼자 집에 남겨졌다. 그녀는 회사가 자신의 그릇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용 사이트를 띄워놓고 대기업들만 골라 모두 서류전형을 넣었다.

2주일 뒤 모든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부모는 그녀에게 조금만 낮추어 보라고 연거푸 말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모두 탈락했음에도 자만심은 꺾이지 않았다. 이를 본 부모는 그녀의 정신에 무언가 이상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혹시 정신에 이상이 있는지 말이다.

어머니는 하루 휴가를 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정신과로 향했다.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짓이라며 극구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그냥 한 번 가주기로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접수를 하고 거의 1시간을 기다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내가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되는 사람이야?”

조금만 참아보자. ? 곧 차례 올 거야.”

그녀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녀의 차례가 오자 진료실에 어머니와 함께 들어갔다. 상담 시간은 그리 길지 않게 끝났다. 다만, 심리검사가 필요하다고 얘기했고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의사가 말했다.

일주일 뒤 그녀는 심리검사를 하러 다시 병원에 왔다. 심리검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귀찮았고 자신이 이따위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사가 끝나고 결과는 다시 일주일 뒤에 나온다고 의사가 말했다.

일주일 뒤에 어머니와 다시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가 조심히 말했다.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폐쇄 정신병동에 입원하셔서 검사를 더 받아보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그녀가 반문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어머니가 그녀의 입을 막고 질문했다.

검사 결과가 안 좋은가요?”

. 좋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폐쇄 정신병동 입원이라는 말을 듣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이지수가 말했다.

제가 왜요? 다른 사람들이 문제지. 저한테 문제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머니는 진료실임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만! 그만! 너 어디가 문제인지도 몰라? 엄마 말 들어 입원해서 검사받고 치료해.”

이지수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렇게 화를 낸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크게 말했다.

몰라! 모른다고!”

그녀는 그대로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를 내버려 둔 채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해가 져 있었다. 산을 올랐다. 꼭대기까지 올라가자 맞은편에 프라베르니아스 간판이 걸린 보라색 텐트가 보였다.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에모제스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올 줄 예상하였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따지기 시작했다.

나한테서 뭘 가져간 거예요!”

거래를 한 건 당신입니다.”

아니, 당신이 거래하자고 유혹한 거잖아요!”

결정은 당신의 몫이었습니다.”

원래대로 돌려놔요. 당장.”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녀는 진열되어 있던 위스키병을 잡고 그의 머리를 쳤다. 병은 산산조각이 나며 유리 파편이 근처에 튀었다. 신기하게도 에모제스는 생채기 하나 없었으며 머리에서 피가 나지도 않았다. 그는 모습을 바꾸어 말했다.

모든 감정은 필요한 법이야. 그걸 판 건 당신이고. 이만 꺼지시지?”

그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당장 뛰쳐나와 산 아래로 뛰었다. 에모제스는 그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다리와 텐트를 없앴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 위에 앉은 다음 말했다.

세상에 부정적인 감정 긍정적인 감정 그런 건 없어. 모두 필요하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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