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 누구보다도 튀는 성격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옷은 준수하게 입는 편이고 잘생겼다고 생각할 외모는 아니었지만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누리던 도중 다가온 한 친구가 있었는데 몸은 왜소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이태건이었다. 외형에 맞지 않게 굵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친구를 시작으로 나는 여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남녀 구분하지 않고 기숙사에 사는 사람들끼리 모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마른 몸매에 큰 눈동자 오뚝한 콧날을 가진 김우정이라는 여자애였다. 말을 할 때마다 우정이가 보여주는 눈웃음은 설렘이라는 감정을 받게 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정이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남자친구의 간섭 때문인지 우리와의 술자리에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 우정이를 부르고 싶어 같은 기숙사에 사는 김주희라는 여학생을 통해 자주 불러냈다. 주희는 술을 먹자고 할 때마다 나와주었다. 나는 그런 주희가 친구로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우정이는 나와도 술 한잔하지 않고 그저 웃음만 짓는 모습을 보였다.
대학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나는 내가 먼저 결제를 한 후 애들에게 받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정이에게만 돈을 받지 않고 나중에 만날 구실을 생기려고 일부러 돈을 받지 않고 다음에 한턱내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우정이는 그럴 때마다 이를 거절하고 돈을 꼬박꼬박 보내었다.
그런데도 나의 노력은 계속됐다. 어느 하루는 우정이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현재 남자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은근슬쩍 학과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임을 유추할 수 있게끔 말했다. 그런데 우정이는 자신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사람인 주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나와 우정이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그녀를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남자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던 우정이는 결국 헤어졌다. 그때 전해 들은 것이 있었는데 나의 다른 친구인 김호권과 사귄다는 말을 태건이에게 들었다. 태건이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 어떤 위로도 나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내가 우정이에게 더 다가갔다면 나랑 사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어느 날 호권이와 나 태건이는 같이 술을 마시기로 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호권이가 자신이 우정이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했다. 처음에 연락하게 된 것은 학과 내에서의 같은 부서에 배치된 것이었고 그 이후로 계속 통화를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고 이런 사이가 같이 영화를 보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일종의 썸이었다. 그리고 사귀게 된 것은 호권이가 수업이 끝나고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고백하여서 만났다고 했다. 내가 느낀 감정은 공허감이었다. 텅 빈 마음만이 남았다. 그리고 잊어야만 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중간고사가 끝나기 무섭게 전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전집에서 나는 특유의 기름진 냄새가 났고 스테인리스로 된 의자 앉았다. 앉자마자 기본 반찬인 절임 양파가 나왔다. 그러고는 바로 모둠전 하나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켰다. 전이 나오기 전 각자 놋그릇에 막걸리를 부어 한잔 마셨다. 그러던 도중 호권이가 입을 열었다.
“요새 여자친구가 너무 바빠서 나를 안 만나 준다. 연락도 잘 안 하고 해도 3시간 정도 텀이 생겨 그리고 저번에는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두 시간이나 늦고 요새 점점 아닌 것 같아. 내가 어떻게 해서 우리 관계를 회복시켜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그냥 끝내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대답은 태건이만 가끔 맞장구를 쳐주었다. 뭐라고 할 수 없는 기분이 나를 장악했던 것 같다. 술이 들어간 상태라 어떤 말을 해도 말실수가 될 것 같았다. 호권이는 그날 술에 잔뜩 취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들로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게 호권이 자신과 우정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원래 기숙사생이 아닌 사람은 들어올 수 없었지만, 기숙사 동장이 우리의 선배라 호권이와 기숙사 방에 들어가 같이 잤다.
다음날이 되고 호권이는 자신이 취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에게 어제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다. 우리는 별 말하지 않았다고 답을 했고 호권이는 샤워실로 가서 씻고 기숙사를 나갔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호권이와 우정이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우정이에게 한 발 더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잊지 못한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권이는 헤어지면서 우정이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우정이를 보면 인사를 했다. 하지만 우정이는 이런 호권이를 무시했다. 나는 내 맘대로 나를 호권이에게 투영시켰다. 내가 호권이었다면 안 헤어졌지 않았을까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에 불과한 생각들을 말이다.
나는 우정이와 술을 먹기 위해 주희를 불러냈고 나와 주희는 생각보다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둘은 잘 맞았다. 이때까지는 주희가 나를 맞춰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단둘이 만나는 경우는 잘 없었지만, 수업시간이 겹치거나 식당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같이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이야기를 하는 정도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우정, 태건, 주희, 나는 술을 마시러 나갔다. 우리는 부대찌개 집에 들어가 소주와 맥주를 섞어 소맥을 마셨다. 그사이 나는 주희와 자주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던 중 내가 술기운에 주희에게 우정이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주희는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라고 말을 하고 담뱃불을 끄고 들어갔다. 2차로는 칵테일바를 갔다. 그곳에서 도수 높은 술들을 마셔 나와 주희는 만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주희는 키스하고 있었고 이를 우정이와 태건이가 말리고 있었다. 결국, 가게에서 쫓겨났다. 기숙사는 이미 문을 닫은 상태여서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는 동아리방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기숙사가 열리는 새벽 5시까지 잠을 자고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우리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터벅터벅 걸어갈 뿐이었다.
기숙사에 들어가 다시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나자마자 태건이에게 묻고 싶었지만, 태건이는 잠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술 때문에 머리는 아팠고 주희하고의 여러 생각이 나면서 두통은 더 심해졌다. 두통약을 한 알 먹고 잠이 들었다.
잠에서 차라리 깨지 않았으면 했다. 잠에서 일어나자 옆에는 태건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토요일이었기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나 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을 때 우정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정이는 어제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고 더 자세한 건 주희와 얘기를 해보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주말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지나갔다. 일요일 늦은 저녁에 태건이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곤 주희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연락도 해보지 않았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태건이는 싱겁다는 듯이 약간의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여자를 대하는 방법 같은 것들을 열거하면서 말해주었지만, 그 방법에는 주희하고 나와 연결할 방법은 없었다.
월요일이 되고 제일 긴장이 흐르는 아침이 되었다. 나는 수업 갈 준비를 하고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그날은 유독 내 몸을 꾸미는 것에 공을 들였다. 머리를 빗고 왁스를 바르고 옷도 내 몸에 대보면서 어울릴만한 옷을 골랐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수업 내용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주희 생각만이 맴돌았다. 그때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리고 확인하자 주희에게 수업이 끝나고 얘기하자는 연락이 왔다. 수업이 끝나고 나와 주희는 서로를 멍하니 쳐다봤다. 주희가 나에게 조금씩 다가오자 태건이가 눈치를 챘는지 호권이를 데리고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침묵을 깬 것은 주희였다. 카페에서 얘기하자는 말 한마디였다. 나는 알겠다고 입을 열어 답했다. 카페에 도착하자 주희는 저번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사실 나를 좋아한다고 했고 그때의 일을 후회하냐는 질문을 했다. 주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주희는 나를 예전부터 좋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주희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랑을 받는 것은 필요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너와 만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쏟아내며 나에게 우정이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녀에게 말하자 주희는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사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서로에 대한 무지는 의심으로 번져나갔다. 주희는 가끔 아직도 우정이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 앞에서 우정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리고 기말고사 기간이 시작되었다. 주희는 성적에 꽤 힘을 쏟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와의 연락도 줄이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나는 이런 외로움을 동아리의 회식이나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풀었다. 그리고 만취하는 날도 많아졌다. 취하는 날에는 꼭 주희에게 전화했다. 그리고는 주희에게 서운해할 만한 말들을 많이 뱉었다. 예를 들면 나와 사귄 걸 후회하는데 말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아니면 나보다 좋은 남자들이 많으니 내가 소개해주겠다고 등 말을 했다. 이때 주희는 나를 시한폭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주희는 생각보다 희생적이었다. 나의 이런 모습도 자신이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중요하게 여기었다. 그렇기에 나의 시험 기간에만 국한되었고 외로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종강하고 방학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데이트를 자주 했다. 우리는 홍대입구역에서 만나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호텔에 가서 사랑을 나누었다. 대학교에서 누리지 못한 것들을 누린다고 생각하며 일주일에 4번을 만나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자주 만나는 주에는 피곤함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때 너무 잦은 만남도 너무 적은 만남도 나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월 중순이었다. 나는 호권이와 태건이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갔고 각자 집으로 가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만취가 하고 싶었다. 처음에 1차를 갔을 때 우리는 전부 다 괜찮았다. 나는 2차를 가자고 했고 그들에게 졸랐다. 처음에는 둘 다 거부했지만, 태건이의 집이 가까우므로 2차를 끝내고 가서 자기로 했다. 점점 취하기 시작하자 입을 열었다.
“요새 나하고 주희하고 너무 자주 만난다. 처음에는 매일 봐도 좋을 것 같았는데 아니더라 그냥 서로 외로워서 만나는 거지 싶어 이게 맞을까? 근데 그렇다고 내가 주희를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닌 것 같아. 사실 잘 모르겠어. 뭐가 맞는 것인지.”
태건이는 그 얘기를 듣더니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권태기네”
그 말을 들은 나는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놓았다. 호권이는 태건이의 말에 공감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잔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어나 보니 태건이의 집이었다. 호권이는 이미 집에 돌아가 있었다. 태건이에게 내가 어제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지만, 별말 없었다며 넘어갔다. 태건이네 부모님이 아침이라며 김치찌개를 끓여주었다. 나는 먹고 싶지 않았으나 예의상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그리고 전날의 과음 때문인지 속이 메스꺼워 지하철을 타기 전 화장실에 가서 전부 게워냈다. 그러던 도중 기침과 열이 나서 병원에 들르자 감기라고 말을 하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집에 도착하자 밥 먹을 기운조차 없었다. 먼저 씻고 난 후 침대에 누워 이불을 어깨까지 덮은 후 주희에게 어제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주희는 화가 난 상태였다. 자신이 나보고 어제 누구랑 놀았는지 증명하라고 말했다. 나는 태건이, 호권이와 함께한 연락내용을 보여주었다. 주희는 의심을 거두고 화도 금방 풀어졌다. 나는 조금 쉰다고 다시 연락했다.
일어나 보니 해가 지고 저녁이 되는 그 중간인 황혼이 보였다. 나는 주희와의 계속되는 관계를 위해 자신과의 약속을 세웠다. 술을 줄이고 이성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자주 만나는 것은 피하기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만 만났고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줄 알았다.
우리는 개강을 앞두고 시간표를 맞추기로 했다. 또한, 주희는 시간표까지 맞추는 것도 모자라 저녁밥을 자신하고만 먹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마치 속박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주희에게 저녁은 친구들과 먹을 테니 이해해 달라고 말했고 주희도 살짝 서운한 티를 내며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아니 자주 주희랑도 밥을 먹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우리는 수업이 없는 평일 중 하나에 시간을 맞춰 놀이공원으로 데이트를 하러 갔다. 딱히 세워둔 계획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냥 타고 싶은 놀이기구를 타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유독 사람들이 없는 날이었다. 놀이공원에 있는 기구를 다 타도 시간은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나가야 하나 생각을 할 때 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더 탈 게 없다. 그치?”
“그러면 나가서 다른 데나 좀 갈까?”
밖으로 나가서 걷자 어느새 시간은 5시가 되었다. 그러다 꽃향기에 잠시 발을 멈춰 꽃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중 예쁜 보라색 장미가 보였고 주희도 그 꽃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는 주희에게 그 꽃 한 송이를 사 선물해 주었다. 꽃장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자친구가 꽃 좀 볼 줄 아내 보라색 장미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에요.”
주희는 그 꽃을 받자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에 유명한 피자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페퍼로니 폭탄 피자 한 판과 맥주 500cc 두 잔을 시켰다.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오늘 하루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날이 유독 생각나게 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번만큼 완벽한 데이트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로 다시 돌아오고 나는 우정이와 같은 수업을 듣는 과목에서 2인 1조로 팀을 짜게 되었고 무작위로 돌린 결과 나와 우정이가 같은 조가 되었다. 주희의 눈치가 보였지만 우정이와 과제를 한다는 핑계로 계속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 사실 나는 아직 우정이를 잊지 못했다.
주희는 그날부터 간섭이 많아졌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연락과 통화가 계속됐다. 나는 여전히 과제를 핑계로 우정이와 카페를 가거나 도서관에 같이 갔다. 카페에서는 서로 앉아 웃으면서 과제를 하기도 했고 도서관에서는 세미나실을 빌려 과제를 하면서 웃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정이와 술 약속을 잡았다. 물론 단둘은 아니었다. 나와 태건이 우정이 그리고 우정이의 룸메이트였다. 태건이를 믿는 나는 여전히 나는 술을 취할 때까지 마셨고 그날 중간에 속을 게워냈다. 그리고 기침을 하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지금은 병원이 다 닫을 때라 갈 수는 없었다.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우정이에게 예전에 사실 너를 좋아했다고 말하려고 했다. 내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 태건이가 눈치를 챘는지 나의 입을 막고 잠시 담배를 피우러 가자고 흡연실로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태건이는 절대 말하지 말라며 나에게 강요했고 나는 괜찮을 거라며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태건이에게 묘하게 설득되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술자리로 돌아오고 다시 다른 얘기를 하기로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저 재미있게 웃고 떠들었던 것은 확실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 계속 얘기를 하고 술을 마시다 보니 우리는 새벽 5시에 기숙사에 들어갔다. 나는 잠을 좀 잔 다음에 일어나 병원을 갔다.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의사는 나에게 결핵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심각한 상태이니 당장이라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치료 받기를 거부했다. 나의 마음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학기가 끝나고 나는 주희에게 1박 2일 친구들과 놀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우정이와 단둘이 만났다. 만나자는 핑계는 그저 친구로서 어떻게 지내라는 것에서 시작된 만남이었다. 나는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도 우정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정이는 검은색 구두에 짧은 치마를 입고 그 안에 넣은 티셔츠 그리고 연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귀에는 적당한 크기의 귀걸이 두 개가 걸려있었고 보라색 큐빅이 박힌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정말로 예뻤다. 나의 볼이 추위 때문에 빨개지는 것인지 아니면 설렘 때문에 빨개지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에 보드카페를 갔다. 직원들이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마실 음료를 정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골랐고 우정이는 밀크티를 골랐다. 보드카페에서 게임을 하다가 서로 손이 겹쳐지는 순간이 있었다. 우정이 손 위에 내 손이 살포기 포개졌고 나는 잠시 흠칫하면서 손은 재빨리 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있자 나는 적응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저녁 6시가 될 때쯤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 분위기는 고급스러웠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려있었고 테이블도 원목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엄청 많은 종류의 양주들이 있었다. 우정이도 여기에 많이 와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주문에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주문표를 보고 조니워커 두 잔을 시켰다. 편의점에서도 파는 술이었기에 익숙했다. 하지만 우정이에게는 그저 쓴 술이었는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다 먹지 않고 나에게 잔을 건넸다. 조니워커를 다 마시고 나는 예술가들의 술인 압생트 한잔 그리고 우정이를 위해 도수도 낮도 달콤한 술인 깔루아 밀크 한잔을 시켜주었다. 나는 압생트라는 술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가볍게 얘기를 풀어나갔다.
“이 압생트라는 술 알아?”
“아니 잘 몰라.”
“이게 예술가들이 먹던 술이야 고흐가 먹고 귀를 자른 술로도 유명해.”
그러던 도중 우정이가 말했다.
“아 진짜? 그런데 너 아직도 주희랑 사귀어?”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우정이를 놓치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기회가 나 자신한테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서였다.
“아니 헤어졌지.”
그러자 우정이는 왜 헤어졌냐고 물었다. 나는 그럴싸한 핑계인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라고 했고 우정이도 알듯이 우리는 너무 갑작스럽게 사귀어서 서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주희에게 평소에 가진 불편함을 열거했다. 사실 주희하고 사귀면 서의 불편함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정이에게 이해할 만한 이유를 말해야 했기에 지어낸 것이 대부분이었다. 거짓말로 얻은 수확은 달콤했다. 우정이는 술을 더 마시고 싶었는지 아니면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인지 숙소로 가서 더 마시자고 제안을 했고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주희의 생각은 이미 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편의점에 들러 위스키 한 병과 안주로 먹을 치즈와 과자를 사고 숙소로 들어갔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자 테이블에는 앉아있어야 할 우정이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서는 샤워기 소리가 들려 반투명으로 되어있는 화장실을 보니 우정이가 샤워하는 중이었다. 화장실 앞에는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우정이는 나오자마자 왜 안 씻냐고 물었고 나는 멀쩡한 척하며 씻는다고 답했다. 다 씻은 다음 우리는 목욕가운을 걸치고 술을 먹기 시작했다. 목욕가운이 우정이에게는 조금 컸는지 가슴 부분이 살짝 드러났다. 나는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우정이가 여기까지 나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여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야?”
“그냥 너랑 같이 마시고 싶어서.”
나는 우정이와 함께 술 한 병을 비웠다. 서로 만취한 상태였다. 이성의 끈을 놓고 본능에만 충실했다. 우정이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나는 그대로 위에 올라타 침대 매트로 밀쳤다. 우정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운을 벗었고 나도 가운을 벗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주희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그때 그 감정과 육체에만 충실했다.
아침이 되고 나는 행복과 동시에 불행을 느꼈다. 주희에겐 죄책감을 우정이에겐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와 우정이는 방을 나오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우정이에겐 우리의 관계를 비밀로 하자고 했다. 주희 때문이었다.
내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주희와 우정이의 데이트나 약속을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알았다. 그래서 작은 노트 한 권을 가지고 그곳에 우정이와 주희의 이름을 써서 데이트를 기록하여 헷갈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진실한 사랑이라고 포장하여 사용했고 둘에게 거짓말을 하며 점점 무너지는 자기 혐오감을 느꼈다.
우정이와의 관계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호권이 신세처럼 점차 연락되지 않았고 답장은 점점 느려졌으며 데이트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우정이와 데이트 약속이 잡히었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평범한 일상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카페를 갔다. 모든 것은 우정이가 중심이 되어 내가 그녀에게 맞춰주었다. 저녁이 되자 차가운 길거리만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우정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헤어지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견을 하고 있었다. 서로 연락이 잘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에게 관심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나온 것도 저 말을 위해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우정이의 말에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 한쪽에서는 눈물이 볼을 따라 서글프게 흐르고 있었다.
“그래.”
그 후 집에 돌아와서 한껏 꾸미었던 액세서리들을 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걸이 두 개를 뺏다. 목걸이 하나를 빼고 모자를 벗고 렌즈를 뺐다. 그날은 모든 것이 이처럼 마이너스였다.
우정이와 헤어진 후 나는 주희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주희가 만나자고 하는 날에 만났으며 주희가 좋아하는 카페를 가고 좋아하는 영화를 봤다. 그리고 기념일에는 한 호텔에서 방을 빌려 노래를 불러주는 서프라이즈 또한 했다. 여태까지의 죄책감에 대한 용서라도 하듯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결국, 주희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주희와 헤어질 이유를 억지로 노트에 적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적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건강 상태를 생각했을 때 더 이상의 만남은 주희에겐 좋지 않은 추억만이 남아있었기에 헤어지자는 연락을 했다. 주희는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고 계속 요구했지만, 얼굴을 보면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연락만 한 채로 우리는 끝이 났다.
사랑에 대한 허망함과 허무감만이 몰려왔다. 사랑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우정이와의 사랑을 정리하면서 그리고 주희와의 사랑을 정리하면서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의사는 나에게 담배를 피지 말라고 강요 같은 권유를 했지만, 그날만큼은 피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담배를 그렇게 피우던 중 갑자기 누군가 내 폐에 깊숙한 송곳을 꽂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기침했고 저번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다.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로 입 주변의 피를 닦고 물티슈로 바닥을 닦았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나는 눈을 좋아한다. 사람의 눈이 아닌 하늘에서 내리는 눈 말이다. 좋아하는 이유는 별 것 아니다. 아름다워서이다. 그중에서도 거의 폭설에 가깝게 내리는 눈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진눈깨비 같은 것은 매우 싫어했다. 비와 섞여 내리는 눈을 보면 금방 녹아버리고 쌓이지 않는 눈이 싫었다.
나는 폐결핵을 감춘 채 입대를 하기로 했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말이다. 내가 가기로 한 날짜는 2월이었다. 하지만 입대를 한 2일 만에 나는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흉부 사진에서 폐결핵이 들통나 당장 병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병원으로 가서 입원하게 되었다.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앞으로 살날이 얼마 없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나의 일상은 매일 호흡기를 달고 있었고 내 맘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여러 장치가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중환자실이었다. 아픈 이유는 역시 결핵 때문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가 차렸다가를 계속 반복하기도 하였고 위험한 고비도 몇 번 넘기었다. 무엇하나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어느 날은 온종일 시체처럼 잠을 자기도 하였고 어느 날은 온종일 눈을 감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을 쉬거나 퇴근을 하면 언제나 나를 보러 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흘리는 눈물에 어떤 감정이 섞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나에게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내 옆에 있어 주었다.
나는 창문을 자주 바라보았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지금은 겨울이 끝나가는 2월 말이었지만 날씨는 아직 겨울과 비슷하였기에 눈이 내리지는 않을까 하고 창문을 자주 본 것이었다.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늘은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지 눈은 내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나의 소식을 어떻게 접했는지 모르지만, 주희가 나의 병문안을 왔다. 나는 비참한 몰골로 누워있었고 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싶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조용함이 흐를 때 얼굴을 다시 돌리자 주희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을 조금씩 흘렸다.
그날 이후로 주희는 나의 병문안을 거의 매일 찾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학업을 포기한 채 말이다. 나의 부모님과도 친해졌다. 나를 기쁘게 해주러 꽃도 사 왔고 날마다 자신이 겪은 평범한 일상인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나에게는 또 다른 간호사 역할을 해준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정신적 지주라고도 불릴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런 주희를 떼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여 말도 듣지 않는 척하고 눈을 감아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주희는 나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었다. 어느새 나도 마음이 열렸는지 그녀를 보면서 웃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 한마디는 절대 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토하는 피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정신을 잃어가는 횟수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끝나겠다고 생각을 한 날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주희가 찾아왔다.
“오늘은 내가 여기로 오는 차 때문에 사고 날 뻔한 거 알아? 아니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버스가 그냥 지나치길래 버스 문을 손으로 쾅쾅 쳤지. 그런데 내 바로 뒤로 오토바이가 엄청 빠르게 지나간 거야 기사님도 문을 열어주면서 놀랐는지 욕을 하더라고 나는 어이없어서 참으면서 탔다. 내가 이상한 건가? 그건 아니겠지? 뭐 다 여러 사람이 있는 거겠지. 그리고 여기 구내식당에서 오늘 맛있는 거 나왔더라 돈가스 하나랑 김치랑 어묵볶음 그리고 국은 콩나물국이었어.”
나는 힘겹게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맛있었겠네.”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목과 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최대한 간결하게 사실적으로 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주희는 몇 가지 얘기를 더 하더니 내일도 온다고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 그녀는 언제나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녀가 나의 곁을 떠날 때 “내일도 올게.”라고 말을 하면 그다음 날에 과연 내가 살아있겠냐는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이 되고 내가 일어났을 때는 창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폭설이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바람은 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보지 못했다. 밖에 나가 눈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몸은 영혼이 존재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감각은 남아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고 의사들이 나를 살리려고 애를 쓰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다름 아닌 주희였다. 주희는 나를 에워싸는 의사들을 보더니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오늘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안 것처럼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나의 손을 잡고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 추운 겨울이고 눈이 내렸지만,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흘렀기에 따뜻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 좋다고 했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다. 주희가 사 온 꽃을 봤다. 다름 아닌 불완전한 사랑의 꽃말인 보라색 장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