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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단편소설

기분의 소통

by 에세이와 소설 2024.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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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병으로 취급받는 그러니까, 어느 새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7년 전부터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극악의 확률로 능력을 갖춘다. 논문에 따르면 어떤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는지는 알 수 없으며 외국에서의 경우 영유아 시절에 여러 검사를 통하여 선별하기도 한다고 한다. 현재까지 그런 아이들은 전 세계에 5명으로 집결된다.

 

 

나는 17년 전에 태어났다. 제대로 된 기억이 나는 것은 5살 때부터다. 우리 집안은 다른 집안들과 사뭇 달랐다. 가족 모두가 하루에 울고 웃고 짜증 내고 기뻐하는 마치 조울증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아침과 밤에 약을 드셨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서 능력을 갖춘 아이가 태어났다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아이였다. 능력을 알게 된 계기는 가뭄으로 농사가 힘들어진 부모가 아이에게 부탁할 때마다 비를 내렸고 이를 이상하게 여겨 저명한 점쟁이에게 데려갔다. 점쟁이는 아이의 능력에 관해 얘기했고 이 소식이 퍼진 것이었다.

 

그 이후로 수많은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때 그 아이 이후로 능력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 뉴스를 보고 아무렇지 않아 했다. 자신의 아이가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가 한 번 더 보도되었다. 점쟁이가 한국에 능력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이었다. 점쟁이는 3일 후에 한국에 온다고 말했다.

 

그 뉴스가 나가자 한국에 있는 모든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에게 특별한 천재성이 있을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곧이어 3일이 지나고 점쟁이가 한국으로 왔다. 나의 부모님도 점쟁이를 찾아갔다. 엄청나게 긴 줄이 광화문을 메웠다. 아직 겨울이었기에 다들 롱패딩을 입고 김밥처럼 둘둘 말아있었다. 줄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윽고 우리 차례가 되자 점쟁이 앞에 섰다. 점쟁이는 나를 보며 놀랐다. 그리고 앞에 놓은 큰 구슬을 만졌다. 그러자 구슬이 빛을 냈고 20초 정도가 흐르자 말했다.

 

능력이 있는 아이입니다.”

 

부모님은 내가 특별한 것이 기뻤는지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며 놀랐다. 어머니가 말했다.

 

무슨 능력인가요?”

 

때로는 모르는 게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알고 싶으십니까?”

 

안 좋은 건가요?”

 

그건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부모님은 서로 귀에 대고 속삭이며 말했다. 결론을 내린 것인지 대화를 멈추고 동시에 말했다.

 

알고 싶습니다.”

 

아이의 능력은 감정을 주변에 공유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만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부모님은 의문점이 풀어지기라도 한 듯 입을 크게 벌렸다. 맞장구를 치며 어머니가 말했다.

 

어쩐지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걱정했단 말이야.”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은 비밀로 해드리죠.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아버지가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왜 비밀로 해야 하죠?”

 

모르는 게 좋다고 말했습니다. 아는 것이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한 기자의 밀착 취재로 인해 빠르게 퍼졌다. 한국에서도 특별한 능력을 갖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로 내 기분은 통제의 길을 걸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유명 인사가 되었기에 애들이 쳐다보았다. 한 몸에 기대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꽤 좋은 관심 중 하나였다. 친구 한 명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우와! 네가 능력자야?”

 

쑥스러웠다. 능력자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기도 했고 그에 비해 내 능력은 볼품없었다. 그래도 이런 대우가 좋았다. 내가 말했다.

 

. 맞아.”

 

그러자 그 애는 똘망똘망한 눈을 한 채로 내게 말했다.

 

너 지금 행복해?”

 

아무것도 모를 나이, 그리고 주변 애들과의 친밀감과 장난감만 있다면 행복할 나이였다. 고민 없이 말했다.

 

. 행복해!”

 

그렇구나, 어쩐지 우리도 행복하더라!”

 

친구가 한 명씩 늘었다. 내 주위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함께했다. 그들은 행복감을 느꼈고 나 또한, 그랬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행복했다.

 

 

그러나, 심각한 사춘기가 찾아왔다. 능력은 이때 독이 되었다. 사춘기는 마치 우울증 같았다.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어 혼자가 되고 싶었다. 가출을 일삼기도 했다. 그런 부모님은 당연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의 감정을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정신과를 더욱 자주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자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친구들이 있었으나, 계속되는 나의 우울감에 의해 그들은 나와 같이 있는 것을 꺼렸다. 처음에는 피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부모가 찾아와 선생님에게 항의했는지 따로 나를 불러 말했다.

 

현수야 요즘 기분은 어때?”

 

그곳에서 실제로 느끼는 기분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갈까 봐 걱정하면서 거짓말을 둘러대야 할지 고민했다. 음 끝을 흩트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냥 그저 그래요.”

 

선생님은 이를 거짓말로 간주한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게 반 분위기는 무기력으로 감싸 안았고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선생님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래? 그렇게 안 보이는데 정말이니?”

 

이미 답을 정해놓고 묻는 것에 나는 그저 오답을 말할 뿐이었다. 결국, 인정하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했다.

 

사실, 우울감이 좀 있어요.”

 

너를 배려해서 그러는 건데 다른 학교로 전학 갈 생각 없니?”

 

배려라는 말의 위선으로 사회에 구석진 곳으로 떼려 넣을 생각이었다. 더 우울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앞에 있는 선생님도 우울한 기분을 느끼고 내게 얘기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반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긍정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말을 그저 하나였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 생각해봐.”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반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선생님은 무엇을 까먹었는지 다시 말했다.

 

! 현수야. 그 한 가지 말 안 한 게 있는데.”

 

?”

 

“3학년 건물 4층에 빈 교실 있는데 오늘부터 거기서 너 혼자 수업하게 될 거야. 이해해 줄 수 있지?”

 

순간적으로 울화가 가슴 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탓을 돌리고 싶었다. 내가 탓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부모님이었다. 털레털레 3학년 건물 4층으로 올라가며 퀭한 동공으로 계단을 응시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어머니가 계셨다.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났다. 누군가 그랬다. 자신과 제일 가까운 사람은 나와 동일시하여 제일 만만하게 생각한다고. 그 대상이 어머니였나 보다. 최대한 화를 참기 위해 방 안으로 인사도 하지 않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 감정이 전달되었는지 어머니가 문을 열고 말했다.

 

인사도 안 하고 들어가니?”

 

참아야 했는데 참지 못하고 말했다.

 

! ! 날 낳았는데.”

 

어머니도 최대한 꾹 참고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했다.

 

네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으니까!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매일 널 보며 미칠 것 같아. 정신과에 들어가는 비용만 얼마인 줄 알아?”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진짜로 죄를 저질렀다. 세상에 태어난 죄 말이다.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고 소리 내어 울었다. 슬펐다. 어머니도 갑자기 울며 나에게 달려와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아들. 엄마가 순간 미쳤나 봐. 그런 말 하면 안 됐는데.”

 

더욱 서러운 것은 내가 울자 울며 나를 위로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조종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엄마와 같이 찾아갔다. 선생님과의 대화 끝에 강제 전학은 가지 않기로 하고 교실을 따로 써서 수업을 받기로 했다. 이제 친구들은 보지 못한다. 친구라고 하기에도 모호하지만 말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학교에 잘 가지 않았다. 실제로 그럴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학교에 가지 않으면 친구들과 선생님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자신을 옥죄었다.

 

 

 

사춘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해졌고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 가족은 점점 싸울 때가 많았고 눈물도 많아졌다. 아버지는 이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술에 손을 대었고 어머니는 담배를 배워왔다. 집안에는 담배꽁초와 술병들이 즐비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했다. 집안에만 있으면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내 방문을 뚫고 들어왔다. 부모님도 나를 봐주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의 감정만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 내가 외출할 때면 부모님은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마중 나와 갔다 오라고 말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측되었다. 내가 빠져야 누군가의 행복이 채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산책하러 나갔다. 그것도 꽤 오래 말이다. 추운 겨울날에 오는 눈은 비운의 아름다움이었다. 4시간을 정처 없이 걸었다. 집 앞에서부터 좋지 않은 느낌에 털끝이 곤두섰다. 문을 열자 악취가 풍겼다. 여전한 담배 냄새와 술 냄새였다. 이상한 것은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안방 문을 여는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는 목에 밧줄을 걸고 힘이 축 빠진 채 늘어져 있었다.

 

 

 

집에 진짜 혼자 남게 되었다. 장례식은 치르지 않았다. 유산을 물려받았다. 유산은 꽤 큰돈이었다. 모두가 떠난 텅 빈 집안에서 무언가의 흔적을 찾으려 돌아다녔다. 안방에 있는 탁자 위에는 옛날에 부모님과 같이 찍었던 웃고 있는 내가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들고 한없이 울었다. 눈물이 메말라 나오지 않을 정도까지. 그 옆에는 담배 두 상자가 있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소주가 10병 넘게 있었다. 나도 똑같이 죽기로 마음먹었다. 베란다라고 나가 창고에서 밧줄을 꺼내었다. 담배를 태워본 적이 없지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처음 피는 것 같지 않게 콜록거림도 메스꺼움도 없었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와 거의 들이켰다. 정신이 몽롱해질 때 밧줄을 목에 걸었다. 의자 위로 올라가 뛰어내렸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죽는구나 싶다는 느낌이 들 때 밧줄이 끊어졌다. 방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다시 울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울다 지쳤는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일어난 곳은 안방 침대 옆 바닥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고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그대로 물 2L 한 병을 들이켰다.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속에서 토가 올라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몇 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토를 했다. 몸이 찝찝했고 입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해 씻기로 했다. 샤워하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너무나 고요하고 조용했다. 무심코 TV를 틀었다. TV는 마침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통계가 나와 있었다. 10대 청소년 중 20%가 넘게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예방책으로는 더 심해지기 전에 상담과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하루하루가 똑같았다. 무기력감에 찌들어 남은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지쳐 잠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어느새 담배와 소주는 없어졌다. 그것들을 사려면 밖에 나가야 했다. 처음은 괜찮겠지 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술과 담배는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하지 않자 더욱 힘들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결국, 밖을 나가야 했다.

 

밖은 어느새 봄이었다. 벚꽃과 개나리가 옹기종기 모여 피어있었다. 남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걷기 시작했다. 마트에 도달하자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직 나는 미성년자라는 것을 말이다. 신분증 검사로 인해 술과 담배는 사지 못했다. 집으로 급하게 걸어가는 도중 완공된 지 얼마 안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TV에서 봤던 청소년 우울증, 제대로 된 치료의 필요성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끄트머리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역으로 바뀐 기분이 들었다. 이들에 의해 내가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접수하고 순번을 기다렸다. 내 앞에 8명이나 있었다. 내 차례를 앉아 기다렸다. 한 명씩 사람들이 줄어들자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었다. 이윽고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의사가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제가 능력자인데요. . 뭐냐. 많이 아파서 왔어요.”

 

의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능력자라는 말에도. 많이 아파서라는 말에도. 그저 다시 한번 말할 뿐이었다.

 

침착하시고 말씀하세요.”

 

얼마 만에 보는 친절인지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가슴을 울렸다. 내가 말했다.

 

예전부터 제가 병이 있어요. 저 자신의 감정을 남한테 전달하는 그런데 이게 좋은 게 아니라 나쁜 쪽으로 방향이 가요. 이러한 점 때문에 저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기고 이런 강박증이 우울증으로 번진 것 같아요. 혹시 선생님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환자들이 자신만의 기분을 얘기하는 데에만 집중했지, 자신의 기분을 돌아본 적이 없는지 살짝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곧바로 얘기했다.

 

제 기분은 언제나 평범합니다.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아요.”

 

저 말은 거짓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나를 위해 그러니까, 환자를 위해 하는 선의의 거짓말 이런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심으로 얘기해주세요.”

 

정말입니다. 지금 제 기분은 평탄해요. 우울하지도 기쁘지도 않습니다.”

 

화를 냈다. 계속된 거짓말 때문에 말이다. 내가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냥 있는 그대로를 얘기해!”

 

그런데 의사는 화를 내기는커녕 밖에 있는 간호사가 들어오려 하자 제지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끌어당긴 다음 나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많이 힘드셨죠?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때 느꼈다. 진심으로 내 기분에 통제당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사람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황파악을 한 후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까 얘기한 거마저 하시죠.”

 

처음에는 그 능력이 좋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저 때문에 남들이 피해를 보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가정 그러다 학교까지 퍼졌고요. 결국, 부모님은 저 때문에 둘 다 자살했어요. 이제는 정말 혼자 남아서 저도 죽으려고 마음먹었는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저 이제 어떡하죠?”

 

그럴 수 있습니다. 현수 씨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지만, 술과 담배에 빠져서 살아요.”

 

그렇군요. 아예 끊으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조금만 줄여주실 수 있나요?”

 

희망찬다는 말을 여기서 사용하라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뻗은 조그마한 손길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다가왔다. 진심으로 휘둘리지 않고 걱정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내가 말했다.

 

. 그렇게 해볼게요.”

 

오늘 약은 수면제하고 불안장애를 처방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줄이다 보면 수면장애나 불안증세가 올 수 있어요. 그때 봉투에 표기된 약을 드시는 것을 권고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똑같이 다음 주 금요일 이 시간에 한 번 더 오실 거죠?”

 

나도 모르게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 그럴게요.”

 

조심히 가세요.”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수납을 하고 집으로 걸어가던 도중 여러 마트를 둘러서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곳까지 돌아 소주와 담배를 사고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보기보다 너무 조용한 것이 싫어 아무 소리나 듣기 위해 튼 것이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소주를 넣고 담배를 태웠다. 원래대로라면 한 번에 3~4개비를 태우지만, 지금은 한 개비만 태우기로 했다. 집안 꼴을 보니 너무 더러웠다.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 식탁 위에 즐비해 있는 소주병들을 치우기로 했다.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담배꽁초를 전부 버리고 소주병은 분리수거를 했다. 그것들을 치우고 밖에서 다시 들어오는 순간 악취가 집 안에서 풍긴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근처 마트에 둘러 향초를 사서 왔다. 향초를 집안 곳곳에 태웠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청소하느라 피곤했던 탓일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집안이 따뜻했다. 아마도 여러 군데에 향초를 피웠기 때문인 것 같다. 입꼬리가 약간 위쪽으로 움직였다. 지금 행복한 것일까. 하지만, 아직 밖을 활발하게 돌아다니기에는 무서웠다.

 

그러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기분의 폭이 너무나도 쉽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평소대로라면 술을 찾겠지만, 처방해준 약을 먹기로 했다. 약을 먹고 30분 정도가 지나자 기분은 평탄해졌다. 효과가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약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구별하기 힘들었다.

 

일찍 잠이 든 탓일까. 아니면, 술을 먹지 않아서일까. 자정이 다가오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수면제를 한 알 먹고 침대로 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수면제를 먹고 죽는다면, 지금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심으로 죽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닌지는 수면제를 딱 한 알만 먹을 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상이라는 고통이 있지만, 이 고통을 이겨내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빠르게 흐르길 바랐다.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그 의사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 인생에서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병원에 가기 위해 옷을 입었다. 옷에는 담배 냄새가 배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꾸밈이라는 것을 해 본 지 오래였다. 밖에 나가 옷가게에 들러 쇼핑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입고 벗기를 반복했다. 이내 마음에 드는 코디가 있었고 그대로 입고 밖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아직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간호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따라 환자가 더 많았다. 접수한 후 병원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집에서 나는 향초와 비슷한 향이 코를 찔렀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현수님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의 기대가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꾸벅 인사를 하자 의사가 말했다.

 

그새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예전의 나라면 그 말조차도 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지금은 다르다. 내가 말했다.

 

선생님 덕분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 담배도 좀 줄이고 집도 청소하고 옷도 샀어요. 그리고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어요.”

 

의사는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가 말했다.

 

. 왜 오늘만을 기다리셨어요?”

 

그야 선생님이 있으시잖아요.”

 

의사는 그 말을 듣자 조금 염려하는 듯이 말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시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좋지 않아요. 혹시 취미가 있으세요?”

 

생각해보니 취미가 없었다. 요새 호감이 가는 행동들도 없었다. 내가 말했다.

 

아니요. 없어요.”

 

운동이나 독서나 영화감상 그런 것들을 한 번 만들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에게 있어서 의사의 말은 사실상 명령과도 비슷했다. 물론, 그 명령이 나쁜 쪽으로 번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동기부여 같은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노력해 볼게요.”

 

좋습니다. 잠이나 식사는 잘 하셨나요?”

 

잠은 수면제 덕분이었고 식사 때마다 술을 곁들인다고 해야 할지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의사에 질문에 모호하게 답변했다.

 

잠이 안 올 때마다 수면제를 먹어서 그런지 잠은 잘 왔어요.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지는 않아요. 그리고 무언가 먹을 때마다 아직 술은 마시는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이번에 수면제 강도를 조금 낮추어볼게요. 그리고 알코올 의존증이 있어요. 말씀 들을 때 심한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줄여보셔야 해요. 아니면 혹시 입원 치료하실 의향 있으신가요?”

 

여태까지 정신병동에 입원한다는 인식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조금 무서워졌지만, 질문했다.

 

입원 치료라면 혹시 주사 맞으면서 방에 갇혀있고 그런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생각보다 자유롭고 검사나 환자 동태를 살피기 좋아서 권유하는 거예요.”

 

입원 치료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나 때문에 다른 환자들의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사태가 초래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말했다.

 

조금 고민해보고 다음 주에 말해도 괜찮을까요?”

 

.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혹시 더 얘기 나누고 싶은 것이 있을까요?”

 

저희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의사는 생각보다 의외에 답변했다.

 

저도 다음 주에 말해도 될까요?”

 

. 그렇게 하셔도 돼요.”

 

진료실로 나오자 다시 다음 주까지 버틸 명분이 생겼다. 의사의 대답 말이다. 어둠이 깔린 숲에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조금 시간이 아까웠다. 혹시 모를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병원에서 불안장애약을 먹고 산책하러 나갔다. 길거리를 걷자 예전과는 다름이 느껴졌다. 저번만해도 분명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나 기쁨이 보이지 않는 칙칙한 표정들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반려견과 산책하며 웃음을 짓는 사람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는 가정과 연인들이 보였다. 소박한 꿈이라도 완성된 듯이 그들을 보며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꼈다.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조용하기만 한 집안을 메꾸기 위해 TV를 트는 것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기 위해 TV를 틀었다. 소주를 마실까 생각했지만, 저번에 혹시 몰라 같이 사둔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치킨도 배달시켰다. 따끈한 치킨 다리를 뜯고 삼키고 느끼함을 가시기 위해 맥주를 마셨다. 소소한 행복이었다. 오늘 하루는 쓰디쓴 술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닌, 달콤한 하루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평범함에 점점 가까워지는 하루를 보내었다. 불과 2주일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병원 진료 날짜가 다가왔다. 먹던 약도 마침 딱 다 떨어졌다. 똑같이 병원을 향해 걸었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이번에도 잘 지내셨나요?”

 

. 요즘 들어 점점 평범함에 가까워지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술은 요즘 얼마나 드세요?”

 

요즘은 소주보단 맥주로 가볍게 즐기면서 마셔요.”

 

좋습니다.”

 

형식적인 질문은 이제 배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해 주시겠어요?”

 

원래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유대감이 깊어지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닌데요.”

 

그 뒤에 말이 무서워 말을 끊고 말했다.

 

같이 등산 가실래요?”

 

그때 말하면서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이상한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의사는 바로 대답했다.

 

언제가 좋을까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일요일 아침 8시 어떠세요?”

 

그렇게 하죠.”

 

그 이후로는 약속장소를 잡고 형식적인 질문과 답이 오갔다. 그런데도 성과가 있었기에 아쉽지 않았다.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한 것은 등산복 쇼핑이었다.

 

 

 

일요일이 되고 아침 7시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등산복을 입고 물과 간식거리를 챙겼다. 가방을 메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10분 전에 도착했음에도 의사는 도착했다. 생각해보니 내 이름만 알려줬을 뿐 의사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내가 말했다.

 

선생님.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제 이름은 권효진입니다. 편하게 그냥 효진 누나라고 부르세요.”

 

저한테 말 놓으셔도 돼요. 누나.”

 

그럼. 그럴까?”

 

등산하면서 많은 얘기들을 나눌 것으로 예상했지만, 초보자 코스임에도 둘 다 저질 체력인지라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내느라 바빴다. 산 정상에 오르자. 운치 있는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음속의 돌덩어리가 빠지는 것 같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옆에서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숨을 내쉬었다. 산 정상에서 그렇게 10여 분을 있다가 내가 말했다.

 

우리 언제 내려가죠?”

 

그러게. 다시 내려가야 하네.”

 

담배를 바로 태우고 싶었지만, 산에서 기본 예의는 지켜야 하기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하산을 시작했고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 덕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등산보다는 짧은 시간이 소요됐다.

 

하산하자마자 아까는 보지 못했던 백숙집이 있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쪽은 나였기에 내가 말했다.

 

누나 저기서 밥 먹고 가요. 제가 살게요.”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내가 낼게.”

 

저 돈 많아요.”

 

그래. 그럼 네가 사.”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장소를 잘못 고른 것일까. 꽤 시끄러운 분위기 탓에 우리도 언성을 높이며 대화해야 했다. 주문하자마자 거의 곧바로 백숙이 나왔다. 처음 본 그녀의 이미지는 산뜻했고 따뜻했다. 근데 닭 다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며 뼈 발라내는 모습을 보자 친누나 같은 이미지로 바뀌었다.

 

백숙을 다 먹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하나 꺼내 태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말리지는 않고 지그시 보다가 자신도 내 담배를 하나 가져가더니 태우기 시작했다. 처음 펴보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누나 담배도 태워요?”

 

. 옛날부터 태웠어. 이제 뭐 할 거야?”

 

저희 같이 사진 찍어요.”

 

그럼 사진관 갈 거야?”

 

그 말에 웃었다.

 

요즘 사진관까지 가서 사진을 누가 찍어요. 네 컷 사진 찍죠.”

 

그게 뭐야?”

 

대충 그런 게 있어요. 제가 찾아볼게요.”

 

아무래도 산 근처라 그런지 차를 타고 중심지로 가야 했다. 내가 말했다.

 

누나 차 있어요?”

 

그럼. 오늘도 가지고 왔지.”

 

여기로 가요 우리.”

 

그래.”

 

차를 타고 15분 정도 이동했다. 근처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시 5분을 걸었다. 가게에 들어가자 머리띠들을 보며 썼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하며 거울에 비친 우리를 보았다. 나는 곰 인형 머리띠를 누나는 개구리 머리띠를 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것은 둘 다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내가 적응이 빨라 누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무슨 자세를 취할지 몰라 엉성하게 손가락을 치켜들고 김치를 하며 사진을 찍었다. 네 컷씩 두 장의 사진이 나왔고 각자 하나씩 가져갔다. 내가 말했다.

 

잃어버리지 말아요. 누나.”

 

그래. 알았어. 태워다 줄까?”

 

그럼 저야 좋지요.”

 

다시 5분을 걸어 주차장에 도착하고 내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곧이어 집에 도착했고 내리려고 하자 누나가 말했다.

 

금요일에 병원 꼭 찾아와. 알겠지?”

 

알았어요. 가볼게요.”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네 컷 사진부터 있는지 확인했다. 소파에 잠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사진을 쳐다봤다. 가로막혀 답답해하던 천장이 아늑한 집 안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 이후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순간들을 나누고 공유했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환자와 의사만의 관계에 국한되기에는 꽤 친밀한 사이로 발전했다.

 

금요일이 될 때마다 간식거리나 커피를 사고 병원에 방문해 전달해주면서 얘기했다. 평범한 것임에도 수다거리는 계속해서 생겼다. 언제 잤냐 밥은 먹었냐 무슨 환자가 있었냐 등등을 말했다.

 

그날도 금요일이었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누나는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현수야.”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각을 잡는 걸까 싶었다. 기분이 안 좋아지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약간의 걱정이 앞섰다. 대답했다.

 

?”

 

학교 다시 다녀보는 거 어때? 난 네가 평범한 삶에 가까워지면 좋겠어. 물론, 지금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나 말고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대학도 가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때?”

 

그녀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내 능력의 범위에서 제외되는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학교에 가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고민하던 와중 그녀가 한 번 더 말했다.

 

내가 많이 응원해 줄 게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도록 말이야. 힘들면 와서 말해도 좋고 안겨도 좋아. 다시 갔다가 아니면, 돌아오면 돼. 부담 느끼지 마.”

 

조금 고민할 시간을 주세요.”

 

그래. 알았어.”

 

그 얘기를 하자 분위기의 무게는 조금 무거워졌다. 깊은 고민에 빠지느라 그다음 대화가 뭐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약 봉투를 부엌 탁자 위에 던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고민할 거리가 있기에 TV는 틀지 않았다. 눈을 감고 팔을 이마에 대어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과연 내가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예전으로 돌아가 다시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아까 누나의 표정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걱정하며 나의 앞길을 위해 도전을 해보라는 표정 말이다. 그 표정이 떠오르자, 응원해주고 나를 위해준 사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부터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겨울이 찾아왔다. 중학교 검정고시는 합격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입학식에 꼭 찾아온다고 했다. 1월 입학식 날 그녀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떨리는 두 손이 겁을 먹어서인지 새로움을 느껴서 좋은 탓인지 잘 인지할 수 없었다.

 

입학식은 빠르게 진행됐다. 정신이 쏙 빠졌다. 그곳에서 다른 애들하고도 간단하게 말을 나누고 통성명을 했다. 말을 나누며 그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켜봤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쓸모없었다. 모든 이들은 나와 대화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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