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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판정 병원 수기 첫 병원에 방문했을 때는 19살이었고 별 것 아닌 거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약을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다. 그때는 아티반이라는 약물 하나만 처방받은 채였다. 약물을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에게 정신과를 다닌다는 사실을 들켰다. 부모님은 정신과가 나에게 큰 오점으로 남을 줄 알았고 계속 다닌다면 용돈을 끊어버리겠다는 말을 했다. 부모님의 용돈 없이 살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급하게 병원에 가서 다 나은 척 괜찮은 척을 하며 나와야 했다. 두 번째로 병원에 방문했을 때도 부모님 몰래 갔다. 이번에는 큰 대학 병원이었다. 그곳에서는 나를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판별했다. 항우울제와 급성 불안 장애에 필요한 약을 처방해주었다. 다행히도 그때는 휴학 중이라서 낮에 병원을 갔다 오면 아무도.. 2024. 12. 21.
절연 절연의 발단 술에 취하고 자살 시도를 하고 그런 날이 반복되었다. 어떤 결핍이 있는 것이 분명했고 이런 결핍을 채우기 위한 관심이 필요했다. 누군가 공감하고 누군가 이해해주고 누군가 같이 자살해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욕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상대가 나와 너무 가깝지 않았으면 했다. 너무 가까우면 공감과 이해가 아닌, 해결책만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즉, ‘넌 이래서 안 돼’가 아닌, ‘힘들었겠다. 제발 살아주면 안 될까?’라는 답장을 더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군대에 있는 애들 아니면, 대학에 있는 애들 등 되는대로 전부 연락했다. 처음에는 그들은 나를 보살펴주었다. 최대한 어루만져주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 2024. 12. 12.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잘못된 방법 팔뚝자해 첫 자해는 친구 앞에서였다. 그는 내가 팔뚝을 긋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기보다는 왜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묻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무관심인 듯한 관심은 나쁘지 않았다. 그가 왜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누군가의 이목을 끌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받아야 내가 사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해는 점점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팔뚝을 그었을 때의 흘러나오는 새빨간 피는 정신적으로는 죽었음에도 물리적으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받쳐주었다. 그렇게 팔뚝에는 상처가 점점 늘어갔다. 자해해본 적이 없기에 그저 상처가 아물면 흉터도 점점 아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흉터는 그대로 남았.. 2024. 12. 9.
용기 없는 다짐 알코올 중독 증세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위로가 되었다. 취기에 빌려 잠이 드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독이 든 잔이었다. 성배조차도 아니었다. 도움은커녕 점점 중독의 길로 나를 이끌었다. 이제는 한 병으로 잠들 수가 없었다. 어느새 주량은 두 병이 거의 넘게 되었다. 그렇지만, 최대한 다른 이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혼자 마시지는 않았다. 아르바이트 비용과 용돈을 대부분 친구와 함께하는 술자리에 허비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친구들과 마실 때도 끝까지 마셔야 했다. 즉, 만취할 때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몇몇 이들은 나와 어울리는 것을 피했다. 남아있는 애들이 있기에 그것을 위로 삼아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렇지만, 돈은 한계가 있었다.. 2024. 12. 6.
꽃이 피는 줄 알았던 시기 꽃이 피는 시기 나에게도 꽃이 피는 시기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 시기는 두 번째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첫 번째 대학교를 겪고 나서 두 번째 대학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교성에 익숙해진 나는 선배, 동기 상관없이 아주 친해졌다. 지금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MT를 가기 위해서는 조별로 장기자랑을 하나씩 해야 했고 대부분은 아이돌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나와 그녀의 인연도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와 합을 맞추면서 우리는 가까워져갔다. 짐을 들어주기도 하고 끝나면 단 둘이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통화를 두 시간을 넘게 하면서 말이다. 그녀와의 가까워짐은 나에게는 새로운 축복이었다. MT가 끝나고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우리가 인연을 맺는 것에 같은 학과에서의 관심이 쏠렸다.. 2024. 12. 5.
부적응자라는 타이틀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둘 다 적응하지 못한 나는 고등학교가 가기 싫었다. 그곳에서도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은 것인지 아버지는 지방으로 발령이 나셨다. 그에 맞춰 이사하였고 아예 연고지가 없는 지역의 고등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외적인 모습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킥복싱 도장을 등록했고 그곳에서 하루에 무려 네 시간을 넘게 운동했다. 단 삼 개월 만에 90kg에서 72kg까지 몸무게가 빠졌다. 이제 모든 것은 준비됐고 나의 행동에 고등학교 생활이 달렸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다행히도 잘 적응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고 게임도 같이했다. 저번과 다르게 행복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내 인생은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곳은 좋은 고등학교는 아니었.. 2024.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