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나보고 의욕을 가질 나이라고 실패에 두려워하지 말고 성공을 위해 앞질러 나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태어날 때부터 비관적인 심리를 가진 나에게는 어려웠다.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태어난 곳은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 5살이 될 때쯤 이사를 했다. 교육을 위해서였다. 외동아들인 나는 어릴 때부터 이쁨을 받고 자랐다. 그것이 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엄마는 언제나 밥을 해주고 나의 교육을 위해 보습학원에 보내기도 하고 여러 예체능 학원을 보냈다.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였다. 엄마가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란 것은 하지 않았다. 유치원에 가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어려웠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어려웠다. 초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엄마도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보면 기특해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다. 만화는 읽지 않았고 대부분 철학책들이나 소설들이었다. 이 책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운명적인 것은 생각이 많아짐이었다. 또래 애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때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다. 비관론자가 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역시 애들과 어울리기란 힘들었다. 먼저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게임 얘기와 축구 얘기를 할 때 나 혼자 철학적인 이야기를 했다. 재미가 없었는지 아니면 이상한 애로 보였는지 주변 애들은 나를 피했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돌아와 버린 지 오래였다. 학교가 가기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애들의 모멸감이 느껴지는 시선들이 싫었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 졸라 현장학습을 하러 가서 학교를 처음으로 이틀이나 빼먹었다. 이틀이 지나고 다시 학교에 갈 상황이 될 때쯤 나는 어느새 엄마에게 가기 싫다고 조르는 중이었다. 엄마는 이를 탈선이라 여기고 회초리를 들고 나의 종아리를 때렸다. 육체도 마음도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울음이 터지고 그제야 엄마는 회초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에 나를 태운 채 학교에서 내려주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아파트 지하상가로 가서 물고기들을 구경했다. 틀 안에 갇혀 사는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져 불쌍했다. 나 자신도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학교가 끝났을 텐데 왜 오지 않냐는 말이었다. 나는 방과 후 프로그램을 한다고 속였다. 어머니는 언제 그런 것을 혼자 신청했냐고 물었고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을 했기에 혼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믿었고 다행히 물고기들을 계속 구경할 수 있었다. 그때 장을 보러 지하상가로 온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왜 여기 있냐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도 회초리를 들고 말했다. 거짓말은 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맞으면서 울기만 했다. 매질이 끝나자 나는 곧바로 방에 들어갔다. 이불을 싸매고 다시는 어머니와 소통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다음날이 되고 이번에는 어머니보고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하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학교에 가지 않았다. 9시가 넘자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오히려 전원을 끄고 다른 아파트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놀이터에서 벤치에 혼자 앉아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중천에 뜨고 배가 고파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있는 돈이라고는 2천 원이 전부였다. 삼각김밥을 하나 사서 뜯어 먹었다. 배가 어느 정도 차자 공포가 몰려왔다. 어떻게 집에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하루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밤이 되고 핸드폰을 켰다.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부재중 전화가 20통이나 와 있었다. 놀이터에서 있는데 경찰들이 나에게 물었다.
“혹시 성준이 맞니?”
“네 맞는데요.”
“어머니가 찾으신다. 같이 가자.”
경찰들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화를 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를 찾아서 다행으로 여겼고 학교가 왜 가기 싫은지 물었다. 그 이유를 설명했다. 친구가 없다고 맨날 혼자 있어서 외롭다고 말이다. 어머니는 학교에 전화했다. 우리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화를 내면서 전화를 하는 어머니가 아닌 그 상황 중간 어디쯤 놓여 있는 나 때문에 말이다.
다음날이 어머니가 일이 있어서 밖을 나가자 늦잠을 잤다. 빨리 일어나 몸을 씻고 옷을 입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로 향했다. 반에 도착하자마자 조회하는 중이었고 자리에 앉았다. 조례가 끝나자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성준아 학교생활이 아주 힘드니?”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가 하시는 말 들어보면 아닌 것 같던데?”
“그냥 혼자가 편해요. 선생님.”
“그래. 그래도 애들이랑 어울리도록 노력해봐. 알겠지?”
“네. 선생님.”
애들이랑 어울릴 마음은 없었다. 이미 엎지른 물을 컵에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반으로 들어가자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머리가 보이지 않으면 주변 애들에게도 전부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머리를 푹 숙이고 팔로 머리를 감싸 엎어져 잠을 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을 감은 채로 망상을 했다. 내가 친구가 많았다면 이라든가 인기가 많았다면 이라든가. 사실 원하는 것들이라고 착각할 만큼만 한 망상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선생님이 들어와 말했다. 방과 후 프로그램을 정할 시간이라고 또래 남자애들은 대부분 운동과 관련된 방과 후를 선택했다. 축구부, 농구부, 배구부 등을 말이다. 여자애들은 손재주를 따라 목공부, 미술부 같은 것을 선택했다. 나는 순위에서 밀려 여자애들이랑 같이 미술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 프로그램이 그날부터 정해지고 수업이 끝나면 여자애들이랑 같이 미술 수업을 또 들어야 했다. 혼자 떨어져 앉으려는 찰나 미술 선생님은 강제적으로 우리를 붙여 앉게 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여자애들은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챙겨주었다.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친구라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른다. 그중에서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던. 신윤미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그림을 틀리면 내 손을 잡고 같이 수정을 해주었고 방과 후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집의 방향이 같아 같이 가던 여자애가 있었다. 그 애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느꼈고 좋아하는 감정으로 발전했다. 학교에 갈 이유가 생겼던 것이었다. 그 애에게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몰래 손편지를 써서 그 애의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같은 또래 남자애들이 보고 그 편지를 꺼내 모든 애가 있는 앞에서 읽었다. 물론 윤미도 포함해서 말이다. 더욱더 실망했던 것은 윤미의 대답이었다. 애들이 놀리기 시작하자 윤미는 내 앞에서 자기도 이런 애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옥상을 자주 갔다. 뛰어내리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 죽을 용기도 없었으니 말이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내 버팀목이 되어주던 사람마저 나를 배신했다.
학교에 가면 반보다 먼저 가는 곳이 옥상이었다. 옥상에서 시간을 최대한 때운 후 조례가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 그제야 겨우겨우 몸을 움직여 반으로 들어갔다. 애들은 여전히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애들의 웃음소리는 그저 소음에 불과했다. 꽃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꽃은 이미 시들어버렸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있던 애 중 몇몇도 나와 같은 중학교에 오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생각한 것은 단 하나였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애들과 어울려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집에서 책을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유행하던 게임들을 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걱정했지만, 애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수라고 묵묵히 마음을 먹은 나를 돌릴 수는 없었다. 애들과 친해지기는 쉬웠다. 게임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애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져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의 애들과는 다시 어울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를 알고 있던 친구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웬일로 학교에서 잘 적응하던 나는 스스로 이상함을 품었다. 나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도 곁에 있을 만한 친구가 있겠냐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난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친구들의 재미없는 농담에도 웃어야 했다. 게임을 싫어해도 해야 했다. 사회라는 장 안에서 나는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반항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걸 하기라도 하면 사회에서 벗어난 동물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애들이 나에게 피시방을 가자 했지만 언제나처럼 가기가 싫었다. 그날은 유독 더 싫었다. 오랜만에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애들에게 다음에 가자고 말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피해망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뒤에서 나를 씹고 있는 애들이 상상 속에 떠올랐다. 애써 그 생각을 무시하고 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책 한 권을 꺼내 읽었다. 늪으로 빠지던 발을 꺼내기라도 한 듯 시원했다. 어머니는 일찍 들어와 책을 읽는 나를 기특하게 생각했는지 과일을 깎아주었다. 어머니의 칭찬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지는 쉬웠다. 첫 번째 게임을 하지 않는 것 두 번째 공부하는 것 이 두 가지만 지키면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밖에서는 애들과 어울리고 집에서는 어머니를 만족하게 하는 데 전념을 다 해야 했다. 나의 자아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학교에 가는 것이 힘들었다. 문제는 집 안에 있는 것도 힘들었다. 휴식이라는 공간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사춘기가 온 나는 반항을 시도했다. 공부를 손에 놓았다. 어머니가 학원을 여러 차례 보냈지만 맞으면서까지도 학원을 가지 않았다. 집에서만 반항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수업을 빼먹거나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럴수록 주변의 친구들이 생겼다. 물론, 대부분 나와 비슷한 부류였다. 결국,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상담을 받게 되었다. 상담 선생님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나이였기에 한번 가 보았다. 상담실을 들어가자마자 여태까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는 다르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말하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이해하는 시선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의 시선이었을까 들어가자 고민에 빠졌다. 가만히 서 있는 내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소파에 앉으라고 말을 했다. 그러고는 보드게임 하나를 꺼내더니 규칙과 하는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상담에 관한 시선을 너무 편견적으로 바라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게임을 집중해서 하다 보니 둘 다 말이 없었다. 상담사는 정적이 싫었는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학교생활은 어때요?”
내 나이가 훨씬 어린데도 불구하고 존댓말을 쓰는 것을 보니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힘들어요.”
조금의 의미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너무 힘들다고 말하면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아 그랬다. 상담사가 말했다.
“어느 부분이 힘들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체적으로 힘든 것 같아요.”
상담사는 말을 하지 않고 보드게임에서 자신의 말을 옮겼다. 내가 지고 상담사가 이겼다.
“제가 이겼네요. 다음에는 어느 부분이 힘든지 알아봐요. 다음에 볼게요.”
상담실에서 나왔고 무슨 일을 했는지 가늠이 안 되었다. 멍했다.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먼저 다가와 주었기에 믿기는 쉬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또다시 배신당할까 봐 무서운 감정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피할 수는 없었기에 다가가 보기로 했다.
다음날이 되고 나는 여전히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상담시간만이 기다려졌다. 그래서인지 집중도 안 되고 머리는 살짝 멍했다. 점심시간 전 3교시 때 상담을 하기로 했으므로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무엇이 힘든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먼저 교우 관계였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속임수에 갇혀 다른 사람들 앞에는 내가 아닌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두 번째는 어느 곳이든 휴식처가 없었다. 집안은 집안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정신적으로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종이에 펜으로 이유를 적었다.
상담시간이 되자 좋은 기분이 돌았다. 나쁘지는 않았으니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유를 적은 종이를 들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저번과 같은 선생님이 앉아있었고 그때는 맡지 못했던 디퓨저 향기가 돌았다. 그런 냄새를 맡으니 더욱 안정되어갔다. 앉자마자 상담사는 말했다.
“저번에 얘기했던 거 기억하시나요?”
“네 그래서 적어왔어요.”
그 말을 끝으로 직접 얘기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는지 나는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를 읽자마자 상담사는 말을 하는 대신 또다시 보드게임을 하나 꺼냈다. 저번과는 다른 종류였다. 게임 중간 즈음 상담사가 입을 열었다.
“왜 이런 부분이 힘들어요?”
“억지로 해야 하니까요.”
그 말을 뱉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인지 아니면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묵묵히 보드게임을 하다 게임이 끝날 때쯤 말했다.
“한 번 억지로 하지 말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 표출해보세요.”
“그게 잘 될까요?”
“한번 해보시고 다음 상담 때 봐요.”
다시 반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정신적 상태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라고 하는 듯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나는 그들이 제안하는 것을 여태까지는 전부 다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부탁들을 거절하기도 하고 골라서 받아들였다. 바뀐 것은 두 가지였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과 진정한 친구로 남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불행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해졌다.
두 번째로 휴식공간이 만들어졌다. 집 안이 아닌 학교가 휴식공간이 되었다. 여전히 부모님에게는 제대로 감정을 표출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라는 휴식공간이 있으니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하고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집안에서부터 점점 썩어가는 문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은퇴하고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나 빈번히 실패했고 빛만 남겨주었다. 결국, 공사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는 어머니도 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집안은 나에게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사업을 실패한 아버지와 그것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은 계속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풀었다. 피폐해지는 가족이었다. 돈이 없으니 이사를 가야 했다. 먼 곳으로 가지는 않아 학교는 전학 갈 필요가 없었지만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내 방은 점점 작아졌다. 처음에는 침대와 컴퓨터 그리고 책꽂이 그리고 옷장이 들어가는 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침대와 컴퓨터가 겨우 들어가는 방으로 옮겨졌다.
상담사는 이 얘기를 듣더니 자립심을 키우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고작 15살 먹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부부싸움을 방문 넘어 듣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얘기할 용기도 없었을뿐더러 괜히 끼어들어 괜히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지 걱정밖에 할 수 없었다.
더 상담하고 싶지 않았다. 상담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라는 것에 부딪힌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상담을 그만둔다고 말을 했다. 집으로 들어가기가 점점 싫어졌다.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야 너 요새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냐.”
“별거 아니야.”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족에 관한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는 자신에게 괜찮다며 말을 해보라고 했다.
“말해 봐 괜찮아.”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얘기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나를 떠나겠지. 이상한 애로 보겠지. 결손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로 보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나에게 탈선하는 법을 가르치기라도 하는 듯 수업이 끝나자 학교 뒤 공터로 나를 불렀다.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그곳으로 갔다. 가자마자 여러 애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에게 담배 한 대를 쥐여줬다. 거부하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서 한 모금 들이켰다. 기침이 나왔고 목에 뭔가 걸린 듯했다. 머리는 살짝 어지러운 상태였다. 애들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한참 더 배워야겠네.”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들이켰다.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적응할 때까지 연거푸 피웠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자 담배는 쉽게 피울 수 있었다. 언제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바로 담배를 피웠다. 관심이 필요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탈선하는 행동을 바로 잡아주는 부모가 필요했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소주병들이 탁자 위에 3병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일찍 퇴근했는지 거실에서 자는 아버지가 보였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일부로 씻지 않았다. 담배 냄새가 나게 하려고 했었다. 2시간 정도가 지나자 어머니가 들어왔고 아버지를 보고 한숨을 쉰 후 바로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내 방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은근히 바랬다. 부모의 관심이 필요했다.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쿵이 아닌 쾅 하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잠이 깼고 또다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옥이 시작됐다. 그때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술 마시고 있는데 너도 올래?”
이때다 싶어 답장했다.
“그래 지금 갈게.”
싸우는 소리 넘어 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갔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누구 말이 맞냐고 대답하라고 했다. 그 모습들이 너무 초라해 보여 한심했다. 아무 대답하지 않고 나가려 하자 아버지가 내 옷을 잡고 당기며 말했다.
“당신 애를 어떻게 키운 거야? 대꾸도 안 하잖아!”
“그게 내 탓이야? 당신 탓도 있지.”
다시 옷을 내 쪽으로 당겨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애들과 만났고 공사중단이 된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주병들과 맥주병들이 보였고 여자애들도 보였다. 그곳에 앉아 담배를 먼저 한 대 태웠다. 여자애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술을 잘 마시는 척을 했다. 어느새 기억이 끊겼고 나는 한 여자애의 무릎에서 정신을 차리렷다. 예뻐 보였다. 몇몇 애들은 보이지 않았고 담배를 가르친 친구와 여자애 둘만이 남았다. 머리가 아팠고 속이 좋지 않았다. 근처 공중화장실로 가서 토를 했고 수돗물로 입가심했다. 그래도 입안이 시원하지 않았다. 텁텁한 입을 그대로 둔 채 애들과 얘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들의 말에 놓아주었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주변을 배회했다. 뒷골목으로 들어가 주머니 안에 있던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하나를 태우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연기가 뿌옇게 나왔다. 마음이 착잡했다. 2시간 정도 길거리를 배회하자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너 지금 어디니? 빨리 안 들어와? 너까지 이러면 엄마는 어떻게 살아.”
“알았어. 들어갈게.”
자식이 걱정되는 마음보다 화를 삭이지 못해 분풀이하는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집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거실에 어머니는 침실에 누워있었다. 문을 열어 왔다고 형식적으로 말하고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옷에서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진동했을 텐데도 관심하나 주지 않았다. 숙취로 인한 두통이 저렸다. 내일은 주말이었기에 다행히 늦게 잠을 자도 괜찮았다.
토요일이 되고 아버지는 공사장으로 일을 나갔고 어머니는 편의점으로 일을 나갔다. 시한폭탄 같은 존재들이 사라지자 집 안이 편하다고 느껴졌다. 배가 고파 부엌으로 갔다. 예전 같았으면 어머니가 차린 음식들이 있을 텐데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달랑 라면 하나만 놓여 있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을 끓였다. 김치를 꺼내 같이 먹었다. 외로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부모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라면을 다 먹고 양치를 하려는 그때 어제 같이 술을 먹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같이 피시방을 가자고 말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기분이 좋게 바뀌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마지막까지 남았던 여자애를 봤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같이 피시방을 가서 게임을 했다. 나는 잘하지 못해서 친구에게 쓴소리를 조금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집 안 보다 집 밖이 더 편했고 더 행복했다. 그 여자애에게 호감을 느꼈다. 좋아한다는 마음이었다. 친구는 우리 둘의 기류를 알았는지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집에 먼저 들어갔다. 그 여자애의 이름은 가예였다. 가예와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관에 도착하고 로맨스 영화 하나를 봤다. 달콤한 영화였고 우리 둘도 달콤한 시간을 가졌다. 영화를 다 보고 사람들이 오지 않는 뒷골목으로 갔다. 그곳에서 담배를 태웠다. 다른 아이들보다 우리는 성숙해 보였기에 뭐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거리를 조금 걷다가 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가예는 밀크티를 시켰다.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몰랐다. 영화에서는 영화만 보면 되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려고 할 때 가예도 입을 열었다. 서로의 목소리가 맞물리자 우리는 수줍어했고 서로에게 먼저 말을 하라고 했다. 저번에 술을 마셨던 일 같이 피시방을 갔던 일 담배를 태우던 일 그런 얘기들을 했다. 서로의 집안 사정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쪽팔려서 그랬을까 그것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남을 이어갔다. 10번 정도 만났을 때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을 했다. 가예는 그런 나를 안아주며 고맙다고 얘기했다. 이제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가예는 자취를 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은 자주 출장을 갔고 그렇기에 아예 따로 산다고 했다. 집안보다 집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가예의 자취방으로 가서 담배를 피우며 TV를 봤고 같이 잠이 들기도 했다. 집에 오지 않냐는 부모님의 연락이 오면 그때야 집에 들어갔다. 다음날 즉, 미래를 생각하며 잠이 드는 것이 이렇게까지도 좋은 줄 몰랐다. 가예와 나의 사이는 점점 더 깊어졌다.
어느 날이었다. 가예는 어디서 샀는지 모를 소주를 3병 정도 들고 왔다. 오랜만에 하는 술이라 그런지 들뜬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덩달아 들떴다. 우리는 술을 마시기 전 배달 앱을 켜서 치킨을 한 마리 시켰다. 치킨이 오기 전까지 소주잔을 꺼내고 물잔도 꺼냈다. 상을 피고 컵을 상 위에 옮겼다. 치킨이 오기까지는 배달 앱에서 확인을 해보니 3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치즈와 콜라 1.5리터짜리를 하나 샀다. 물컵에 콜라를 따랐다. 소주를 한 잔 마셨다. 크으하는 소리와 함께 이상하게 오늘 술이 유난히 달았다. 가예와 같이 세잔을 마셨을 때쯤 배달이 도착했다. 포장지를 뜯고 종이상자만 남겨둔 채 상 위에 올려놨다. 순살로 시켰기 때문에 번거롭게 뼈를 빼지 않아도 됐다.
한 병을 넘어갔을 때쯤 취기가 올라왔다. 가예는 요즘 힘든 일이 없냐고 나에게 물어봤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연속되는 질문이 쏟아졌다. 무슨 일 있냐고, 괜찮으니까 말해보라고 등등 말이다. 그런 설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문장에 넘어갔다. 집안 사정을 얘기했고 탈선하는 이유도 말해주었다. 가예는 자신의 가슴 쪽으로 내 머리를 안아주어 쓰다듬었다. 안도감이 느껴졌다. 언제나 내 편이 돼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것 같았다. 그날은 어머니께 문자 한 통만을 남겼다.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가.”
그 후에 오는 전화들이나 문자는 일부로 보지 않았다. 나에게 독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기에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다. 취기에 이끌려 우리는 사랑을 나눴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을 했고 속옷만 입은 채로 이불을 덮어 잠을 잤다.
다음날이 되고 두통과 속 쓰림을 느꼈다. 어제 먹은 술 때문이었다. 해장하기 위해 편의점에 잠깐 나와 라면을 두 봉지 샀다. 자취방에 들어가니 이불을 정리하고 있는 가예가 보였다.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냄비를 꺼내 물을 올린 후 라면을 끓였다. 어제 마시다 남은 콜라를 들이켜고 라면에 젓가락을 갖다 댔다.
해장을 다 했고 TV에 넷플릭스를 틀고 드라마를 봤다. 내용이 재미있었는지 재미없었는지 어중간하게 그 사이쯤 있었다. 사실 우리가 보는 프로그램은 중요하지 않았다. 옆에 서로만 있으면 된다는 그것이 중요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가 핸드폰을 켜봤다. 무음으로 해서 들리지는 않았는지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내용은 부모님이 걱정되느라 어서 집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문자 한 통만을 어머니께 보냈다.
“친구 자취방에서 잤어요.”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놓았다. 하루는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다. 이러한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가예에게 의존도가 점점 높아져 갔다. 집 안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가예가 있으면 행복했고 없으면 우울하고 불행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더욱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것이 익숙해졌는지 부모님은 나에 대한 신경을 껐다. 언제 들어오냐고 말을 하지 않았고 학교만 다니면 그만이겠는지 생각으로 내버려 뒀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선생님은 인문계를 추천했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이유는 가예는 특성화고를 가기 때문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나는 전기공학과 그리고 가예는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를 갔다. 서로 다른 반이 되어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학교에서 꽤 되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수업이 끝나면 고등학교 근처로 옮긴 가예의 자취방에 들어갔다. 가슴 품에 안겨 자는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부모님의 출장이 없어졌다. 가예는 자연스럽게 본가에 가서 지내게 되었고 전학을 가야 했다. 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물론 그곳에 가서도 연락은 하자고 했고 우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가예가 말했다. 그런 생각에 반발심이라도 들은 듯 나는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똑같은 학교로 전학을 보내 달라고 얘기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금 학교나 잘 다니라는 소리에 망연자실했다. 가예는 본가로 가더니 여러 군데 학원에 다녔다. 그러면서 연락이 줄어들었다. 우울감과 상실감이 크게 나를 덮었다. 하지만 가예라는 끈을 놓칠 수는 없었다. 연락이 줄어들어도 이해해야만 했다. 끈을 놓치기라도 하면 더욱 큰 파도가 내 감정을 몰아칠 테니까 말이다.
주말에 약속을 잡았다. 거리가 꽤 멀었기에 KTX를 타고 가야 했다. 가예와 만나는 약속이었고 또한 전학 간 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벅찼다. 우리는 만났고 나는 만나자마자 품에 안겼다. 하지만 가예는 조금 밀어내는 듯한 행동을 보이며 말했다.
“사실 오늘 말할 거 있어서 불렀어.”
제발 그 단어만은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뭔데?”
“우리 여기까지 하자. 연락도 만남도 이제는 지쳤어.”
“다시 한번 생각해봐.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아니 수십 번도 고민했어. 서로 각자를 위해서 우리는 끝내는 게 맞아.”
“아니 나는 아니야. 그렇게는 안 돼. 너 없으면 안 돼. 나 많이 힘들어.”
“미안해.”
가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뒷모습을 지켜보는 그것밖에 하지 못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인지할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많이 내렸다. 쌓인 눈을 소복소복하게 밟자 비로소 왜 여기 내가 있는지에 대해 알았다. 나는 이제 보고 싶은 것도 만지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목소리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저녁에 KTX를 예매해놨기에 시간이 많이 비었다. 근처 아무 카페나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켰고 밖을 바라보며 마셨다. 뜨거운 커피에 차가운 풍경 그것이 다였다. 두 시간이 지나자 커피를 드디어 다 마셨다. 시간은 아직 한시였다. 배가 고파 밥집을 찾아다녔다. 일본식 가정식이라고 써진 문구를 보고 그곳을 들어갔다. 메뉴판을 펼쳐보았고 고등어 정식 하나를 시켰다. 혼자 온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대부분 간이형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고 나도 그런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밥을 다 먹자 시계는 두 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할 것이 없어 피시방에 들어갔다. 예전과 가예와 자주 오던 것이 생각나 눈물이 살짝 흘렀다. 자리에 앉고 하던 게임을 켰다. 여전히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내 몸속에 내 정신 속에 이미 들어와서 자리를 잡을 대로 잡았기에 바로 잊기가 힘들었다. 시간을 보내고 저녁 일곱 시가 되자 예매했던 표를 들고 KTX를 탔다.
집에 들어가자 여태까지 어딜 싸돌아다니다 왔냐고 아버지가 물었다. 대답 따위 하지 않고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일종의 무시였다.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똑같이 물었지만, 이번에도 무시했다. 날 걱정하는 듯 자신들의 실패를 숨기려 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아니, 어쩌면 그 실패작이 나였을 수도 있다. 우리는 전부 실패자였다. 그래서 이렇게 비참한 벌을 받는 것이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가예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 부모님은 이혼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둘 다 양육권을 포기했고 할머니 밑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랫동안 잘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챙겨주었다. 전에 있던 가정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제일 큰 변화는 이제 고등학교가 아닌 대학교에 다니는 것이었다. 대학에 진학한다는 생각을 하자 내 성격은 활달하게 변했다. 이제는 전의 쓰라림도 아픔도 다 가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대학 OT 날이 다가왔다. OT에 가기로 했고 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면 됐다. 그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놀랐다. 뒷모습이 가예와 똑같이 생긴 한 사람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생각을 두고 일부로 앞모습을 보러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지금 보면 어떤 사이인지 확실히 정리하지도 못한 채이기 때문이다. 학회장이 앞에서 이름을 불렀다. 그 애의 이름이 불릴 때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애의 이름이 불렀다.
“박가예”
그 세글자를 듣자마자 확신했다. 내가 3년간 겨우 잊은 그 사람이 여기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내 이름이 불릴 때 그 애가 뒤를 돌아 나를 확인했다. 우린 서로 눈이 맞았고 그 사실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순식간에 눈을 다시 돌렸다. 심장이 뛰었다. 정확히 말하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에라도 집중하기라도 한 듯 맥박이 느껴졌다. 가예도 이런 심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우리는 서로를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먼저 용기를 냈다. OT 중간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가예가 앉아있었다. 그 옆에 앉아 담배를 꺼내 태웠다. 그리고 넌지시 말을 걸려는 찰나 가예가 먼저 말했다.
“잘 지내?”
그 답에 너 없이도 잘 지냈다는 걸 어필하고 싶어서인지 지질한 문장으로 답했다.
“이제는 괜찮아. 너 없어도 말이야.”
“그래? 사실 나 그때 진심 아니었는데.”
“그러면?”
“그때는 우리가 떨어져야 할 상황이어서 우리는 거리가 멀었고 마음도 어차피 점점 멀어질 게 뻔했으니까 말이야.”
“지금은 어떤데?”
“지금? 지금이라는 말이 제일 어려운 말인데 넌 우리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고 싶어?”
그 질문이 들어오자 머리가 멍해졌다. 비어서 멍한 것이 아닌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답은 있지 않았다.
“모르겠어.”
가예는 말을 듣자 내 핸드폰을 뺏어가더니 연락처를 켜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답 줘. 기다릴게.”어벙한 상태가 이어질 때 가예는 담배를 끄고 다시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예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담배를 피우다 강의실로 들어갔다.